蜩與學 鳩笑之曰..「我決起而飛, 搶楡 枋而止,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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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학구소지왈.. <아결기이비, 창유방이지, 시즉부지이공어지이이의, 

해이지구만리이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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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와 매추라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힘껏 날아도 느릅나무 관목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위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는데 뭐하러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려고 하냐?>

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 適百里者, 宿㫪糧. 適千里者,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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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망창자, 삼손이반, 복유과연,  적백리자, 숙용량, 적천리자, 삼월취량, 지이충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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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로 놀러가면 세끼만 먹고 와도 배가 부르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밤새 먹을 양식을 절구질해놔야 하고, 천리를 갈 사람은 삼개월 먹을 양식을 모아야 하는법이야. 그러니 저 매미와 매추라기가 뭘 알겠나?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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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불급대지, 소년불급대년, 해이지기연야? 조균부지회삭, 혜고부지춘추, 차소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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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식견으로는 큰 지혜에 따를 수 없고, 수명이 짧은 것은 오래 사는 것의 일생을 알 수 없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하루를 모르고 쓰르라미는 1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수명이 짧은 것이다.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上古有大椿 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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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남유명령자, 이오백세위춘, 오백세위추, 상고유대춘자, 이팔천세위춘, 팔천세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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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남쪽에는 큰 거북이가 있는데 오백년을 봄으로삼고 오백년을 가을로 삼는다.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는 팔천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년을 가을로 삼았데.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九特聞, 衆人匹 之, 不亦悲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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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년야. 이팽조내금이구특문, 중인필지, 불역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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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걸 오래사는 거라고 하는거야. 팽조는 지금껏 오래 사는 것으로 이름났는데 사람들이 팽조처럼 오래 살려고 하니 딱한 일이쟎니!



너무 큰 날개를 갖고 있어 날지못하는 돼지처럼 보이는 붕! 어지간히도 비웃음에 시달렸을 것이다. 작은 메추라기도 팔랑팔랑 날아 다니는데 넌 뭘하냐? 뭘하겠다고 바람을 기다리겠다는 뻥을 치는거야?


이에 장자는 각자의 영역이 따로 있음을 말한다. 모두들 가야하는 "평범한" 삶이 있는게 아니라 제각각 타고난 삶이 있다. 개성, 창의성, 독특함 이런거 엄청 좋아하면서도 정작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똑같다. 태어나서부터 단계별로 나이를 먹고 그 나이에 맞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마치 정해진 삶의 룰이 있는 것처럼 잠깐이라도 벗어나면 불안과 초조를 느끼고 조롱을 당한다. 하지만 각자의 삶이지 않는가? 장자가 이 문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가치의 상대성이다. 하루살이가 계절을 모르듯, 우리는 대춘의 봄과 가을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도 모두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자신의 봄과 가을을 무시하고 남처럼 살기를 바라는 일 아닌가?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장자에는 유독 "슬프지 아니한가?" 하는 탄식이 많다. 장자가 살던시대와 지금 시대가 많이 다르지 않다. 자신의 봄과 가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을 향해 줄달음만 치고 있는 삶. 장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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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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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부수지적야불후즉기부대주야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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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얕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어.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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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배수어요당지상즉개위지주치배언즉교,수천이주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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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마루 위 얕게 패인 부분에 물 한 잔을 엎어 봐라. 풀잎은 띄울 수 있어도 잔을 그위에 놓으면 뜨는게 아니라 마루에 딱 붙어버리지.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야.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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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적야불후즉기부대익야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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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바람이 많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가 타고 오를 수가 없어.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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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만리즉풍사재하의이후내금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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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구만리를가려면 바람이 아래에 많이 있은 후에야 바람을 탈수 있어.

背負靑天而莫之夭閼 者而後乃今將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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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청천이먁지요알자이후내금장도남                   펼친 부분 접기 ▲

그래서 푸른 하늘을 등에 이고 나면 거침 없지. 그런 후에야 남쪽으로 가는거야.


*********************


날개가 큰 새를 위한 위로!

앞서 장자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큰 새, "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큰 바람을 타고 간다는 얘기를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제해"라는 기록도 인용했다. 이번에는 그 큰 새가 왜 날기 어려운지를 물리적으로 설명한다. 이 새는 한번 날려면 바람이 모이길 기다려야 하므로 우리는 그 새가 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없다. 평생 못 볼 수도 있다!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처럼 큰 붕은 그 날개를 띄워줄 바람이 없으면 날 수가 없다. (당연하다!) 그러니 평소에 날지 못하는 이 새는 얼마나 많은 모욕과 멸시를 당했겠는가? 지상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날개를 감출 수도 없이 질질 끌고 다녀야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런 쓸모 없는 날개를 가진 붕에게 "너도 새냐?"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당장에 날 수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붕은 그 멸시를 오로시 감당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날개를 펼만한 바람이 모이면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유유히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갈 수 없는 곳에 나는 도달할 것이다. 붕이 받은 수모는 잊혀질 것이다.


이것이 날개가 커서 슬픈 새, 붕에게 주는 장자의 위로이다. 붕은 그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새가 아닌 듯 보이나, 그 새는 높이 날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모든 조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견디는 중이다. 


어쩌면 이 "붕을 위한 위로"가 장자가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라고도 생각했다. 착실히 공부해서 각종 이론을 섭렵한 후 제후의 마음에 쏙 들만한 말솜씨를 갈고 닦아, 한 나라의 책사 노릇을 하고, 그래서 명예롭고 부유하게 사는 삶. 당시의 지식인들이 원하던 삶이었다.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장자와 동시대를 살던 맹자는 그런 삶을 원해서 제후들의 스승이 되고자 했으나 기어이 이익보다 의로움을 앞세우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이다. 진정 한 나라의 이익과 강함을 역설하던 소진과 장의 같은 유세가(외교관이자 정치인)들은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누렸다. 그들이 집에서 쉬면 천하가 조용하고 그들이 6국을 분주히 오가면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던 때. 모두가 공부해서 출세하길 바라던 그 때, 장자는 오히려 그런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행복을 방해하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장자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편협한 상식과 막연한 환상(이루어지지도 않을 소망)에 돌을 던지고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안되는 건 되게 하라"며 불구덩이로 뛰어들 준비를 할 때 "그렇게 뼈빠지게 고생하다 죽어"라고 외쳤다. 행복하고 싶다면서 불구덩이로 뛰어든다고? 제정신이야? 말로는 유유자적 평온한 삶을 원한다지만 그런 삶은 소수의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착취해서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장자는 꿰뚫어보았다. 모두 부자가 되어 남의 서비스를 제 것인양 누리고 사는게 불가능하지만 마치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위선과 거짓. 그걸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행복"을 다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유용한 노예가 될 뿐임을 장자는 이미 알았다. 유용한 노예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우리, 장자의 말에 귀기울여 봐야 하지 않는가?

 

남들이 모두 행복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장자를 사람들은 날지 못하는 붕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아니, 공부는 해서 뭐해? 저렇게 가난하게 살걸? 가족 고생만 시키잖아.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 무슨 말같잖은 소리만 저렇게 하고 다녀?" 평온함과 행복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장자에게 쏟아졌을 비난들, 공부해서 출세는 커녕 취직도 어려운 요즘 세대가 견뎌야 할 모욕이었을지도 모른다. 

장자는 새가 날려고 해도 조건이 갖춰져야 함을 말한다.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바람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반대로 작은 새들은 큰 바람이 불면 날지 못한다. 바람에 날아가 버릴 뿐.... 그런데 바람만 모이면 뭐하나? 아무리 큰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날기를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마침 불어오는 태풍에 작은 새들처럼 두려움에 딸면서 그 큰 날개로 눈을 가리고 몸을 감싸고 숨어 버릴 것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지도 못하는 법이다. "나의 꿈은 왜 여기서 불가능한 걸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노력에서 환상이 깨질 수도 있다. 불안과 두려움. 그걸 이기고 바람이 모일 때까지 날 준비를 하느냐? 아니면 달콤한 안락을 약속하는 곳으로 숨어 버릴 것인가?


장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담배를 피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집을 포기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젊은 여자 "미소"의 삶은 여전히 불안해 보이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영화 "소공녀") 어쩌면 내 생에 붕의 비상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성공과 출세를 욕망하는 회로가 어디 그리 쉽게 변하는가? 역사가 시작한 이후로 면면히 공고히 이어진 욕망이다. 하지만 그런 강렬한 욕망 아래로 비난 받으면서도 매력적인 장자의 사상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장자의 사상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출세를 위한 삶이 다가 아니란 걸 믿는 사람을 위한 바람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전역사시대의 흔적이라고 해야할까? 세상에 평지돌출하는 사상은 없다. 장자의 책으로 전해지는 장자의 사상도 그 당시 비주류들의 사상이 종합되어 전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도가의 소박한 삶, 양주의 위아주의, 농가의 자립적인 생활 추구 등의 사상이 장자라는 사람을 키웠고,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사상은 대량 노예를 생산하는 역사적인 삶의 구조에 의심을 품도록 했을 것이다. 장자도 왜 그런 삶에 의심을 품었을까? 나는 장자도 역사 이전의 기억, 인류의 무의식이 꿈틀거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시대보다 더 오래 계급과 차별없는 전역사의 시절을 겪었음에도 까맣게 잊고서 피라미드식 계급사회를 열었다. 이것이 역사시대다. 계급 사회는 봉건사회나 지금 민주주의 사회나 다를 게 없다.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이건 뭔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싶을 때 오랜 무의식은 깨어날 수 있다. 이런 삶만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우리 눈을 가리는 투명한 유리창에 금을 낸다. 그 금을 따라가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장자 같은 사상가들이 무수히도 많다. 출세를 가르치는 스승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스승들도 무수히 많다는 사실. 그것이 붕새의 비상을 떠받치는 바람들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서도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떠 받치는 바람. 너만 바라는 바람이 아니란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자기 짐을 끌고 이 집 저 집 전전함에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이라며 불가능한 꿈을 꿀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붕새의 비상이라고 하고 싶다. 정말 붕새가 날아오른다면, 그게 현실이라면 이제 붕새는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 그래야 붕새다. 그래야 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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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諧者, 志 怪者也. 諧之言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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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자, 지, 괴자야. 해지언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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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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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지도어남명야, 수격삼천리, 박부요이상자구만리. 거이유월식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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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라는 책은 신기한 이야기들을 적어놓은 책인데, 그 제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어.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떠나갈 때 물방울은 3천리까지 튀고, 붕의 날갯짓으로 생기는 회오리 바람은 9만리까지 솟구쳐 오른다. 떠날 땐 6월 달에 부는 거대한 바람을 탄다."


장자는 시작하면서 거대한 뻥을 치고 시작한다. 크기를 알 수 없는 곤이라는 물고기와 그 물고기가 심지어 "변신"까지 해서 새가 된 후에는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이야기. 평생 바다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너무 황당한 얘기라서 믿겨지지 않을 얘기다. 그리하여 이런 이야기가 뻥이 아님을 "제해"라는 책에 적혀 있다고 증거를 대는 것이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구! 사실 <제해>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책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에 "세상에 이런 일이"정도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매우 상식적으로, 사회 통념에 맞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초상식적인, 초사회적인 일들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내심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일들로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야 말로 북명과 남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아닐까? 마음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곤이 붕으로 변하는 심경변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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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야, 진애야, 생물지이식상취야. 천지창창, 기정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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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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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무소지극야? 기시하야, 역약시즉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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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랭이, 먼지 같은 것은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준거야. 하늘은 저렇게 푸른데, 저게 하늘의 본래 색일까? 너무 멀리 있어서 끝도 없는 걸까? 붕이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아마 이럴거야.


<제해>라는 책까지 들먹이며 자기 말이 뻥이 아님을 강조하던 장자는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눈에 먼지나 아지랭이로 보이는 것들은 생명의 숨결이며 하늘은 높고 높아 푸른 색으로 보이는데 그게 원래 그런 색일까?라는 질문. 하늘은 푸른 지붕일까?  생물들의 숨결이 아지랭이 먼지로 보이듯, 우리 눈에 하늘은 푸른 지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끝도 없는 공간이며 붕처럼 높이 나는 새가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저 푸른 색으로 보일 뿐이라는 말.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거기 어디 사람이 보이던가? 문명이라고 부리는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어디 보이던가? 그저 행성 중 하나가 아니던가? 

장자는 관점의 전환을 유도한다. 애초 곤과 붕의 얘기가 그걸 촉발하던 것이었다. 우리가 감각하는 공간은 사방 끝이 있지만 사실 그 끝의 끝은 끝이 없다. 그 끝의 끝으로 가도 우리의 상식이 상식일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늘을 바라볼 때 그저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이곳의 상식과 질서도 그저 푸르게 보일 뿐일걸! 

자~장자는 이렇게 사방 질서의 공간을 벗어나고자 한다. 사람들이 기괴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사방 질서 내의 공간이 너무 좁고 편협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상상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장자를 통해 알게 된다. 늘 상식적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언제나 그 상식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는 인간. 장자는 그 욕망을 어떻게 사유하는 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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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篇         

1篇 逍遙遊(소요유)

有魚,其名爲鯤. 鯤之 不知其幾千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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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명유어, 기명위곤. 곤지대 부지기기천리야.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사는데, 그 이름은 "곤"이라고 해. 곤의 크기는 너무 커서 몇 천리인지도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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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爲鳥, 其名爲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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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위조, 기명위붕. 붕지배,부지기기천리야.

확~변해서 새가되는데, 그 새 이름은 "붕"이야. 붕의 등도 너무 커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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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飛其翼若天之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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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비, 기익약수천지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 펼친 게 구름이 하늘에 드리운것 같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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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天池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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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야, 해운즉장사어남명. 남명자, 천지야.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깊은 바다로 옮겨가려고 해. 남쪽 깊은 바다의 이름은 "천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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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느닷없이 변신이야기가 등장한다. 장자가 직접 지은 걸로 간주하는 <내편>의 1편 제목은 "소요유"다.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뜻이다. 이 빡빡한 세상에서 "한가하다"라든지, "여유롭다"라는 소중한 말은 리조트 광고에나 나올법하다.장자는 사람들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질서에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황당해서 말도 안된다고 하며 당장에 책을 덮어 버릴 그런 이야기들..철학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사람도 장자밖에 없을 듯...마치 미끼를 던지고 물리는 사람들에게만 자기 얘기를 들려줄 것 같다. "이 얘기 안 믿어지지? 그럼 계속 그렇게 살든가!" 아니면 "놀랍지?신기하지? 재밌을거 같지? 따라와봐. 정말 재밌는 얘기를 해줄게..."라고 매혹하는 첫 장면.

곤이 붕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하던 <논어>의 첫 장과 너무나 비교된다. 장자는 우리를 동네 서당에 머물게 하는게 아니라 북쪽 깊은 바다(북명)과 남쪽 깊은 바다(남명)로 안내한다. 멀리, 멀리 가보자. 거기엔 본적도 없는 동물들이 살고 있어.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도 없는 물고기 곤. 이것도 장자가 지어낸 이름이다. 장자는 송나라 사람으로 북극해나 남극해는 가본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우리가 갈 수 없는 그곳에 사는 물고기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나! 실제로 북극에는 그렇게 큰 동물들이 산다. 북극곰, 바다사자, 일각고래 그 추운 데서 어떻게 그렇게 큰 몸집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인 북극 동물들... 그의 곤 이야기를 들으면 북극에 사는 "외뿔고래(일각고래)" 생각이 난다. 북극, 남극도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다 헤집어놓은 와중에 아직 "외뿔고래"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희한하게 크고 긴 뿔을 가진 고래. 인간 덕분에 멸종위기종이 된 슬픈 짐승.


이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이나 베리 로페즈의 책 <북극을 꿈꾸다>를 추천함.


장자는 이런 동물을 보고 쓴 얘기가 아니다. 북극이나 남극에 갔다 와서 쓴 여행기도 아니다. 마음껏 누리는 상상.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고기가 새로 변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상상. 쪼잔하게 마을에만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 


나는 이 구절의 핵심어가 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말로는 변화라고 하지만 사실 變은 점진적의 변화. 내 눈에 보이는 자라남과 늙음 같은 것이고, 化는 심신의 완전한 전환, 개체의 달라짐을 말한다. 누에고치에서 나비로 변하는 순간도 化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 전체를 변變하다가 化한다고 할 수 있다. 곤충박물관에서 고치에서 나오는 나비를 본 적이 있는데, 좀 전에 같이 매달려 있던 고치들이 이제 옷을 벗고있는 나비를 보면 죽었겠다 생각하겠구나..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비도 좀 전에 같이 매달렸던 벌레들을 "넌 누구냐" 하겠다.. 싶었다. 化란 이런 것이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 


장자처럼 생각하기의 기본이 化라고 생각한다. 배우고 익히고, 출세하고, 유세하고,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화化보다는 변變이다. 차근차근 착실히 단계를 밟아 올라 가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길이다. 균질하게 정해진 길. 그러나 장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참 다양하다는 사실, 평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장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누구나 출세 원하지 않아? 다들 부자되고 싶어하잖아? 누구나 남자 아니면 여자고 남녀가 사랑해서 애낳는거 아니야? 이런 "상식"적인 사람들만 있는게 이 세상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고 원래부터 그렇다고 느끼는 것들조차 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이고, 풍습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차별받고 억압받는다. 차별과 억압은 다른게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없다는 것. 말하고 싶어도 단어가 없다는 사실. 장자가<곤>과 <붕>을 만들어내고 물리적인 신체의 변화를 거론하는 것은 장자가 살던 그 당시에도 배척받았던 수많은 "소수자"들의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고 싶다. 도무지 당신들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당신들의 사고를 뒤집어 보면 알 수 있지... 세상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밖에는 또다시 세상 밖이 있어 무한해!라고, 죽지 않아, 거기 곤과 붕도 사는걸! 걱정마!라고, 절벽위에서 한걸음 떼어 보라고 한다. 혹시 아는가? 붕의 날개가 솟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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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생각해보니 10년만에 다시 장자를 읽는다. 처음, 그 붕새의 비상을 읽고서 느꼈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이게 철학서라고?" (내용 뿐 아니라 책의 물리적 두께도 압도적이었다. 번역본은 거의 벽돌수준으로 두껍다. 두께로 사람을 압도하는 책 중에 하나가 <장자>다.)

 

<장자>의 내용은 신화나 우화집 같은 이야기였지만 읽는 구절마다 나의 고정관념과 자기중심주의, 어리석은 시비판단에 대해 정곡을 찔러대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는 자각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 읽다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날카로운 지적들, 덕분에 편협한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 좀더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해야하나?(물론 그런 힘이 생겼어도, 언제나 어리석은 짓을 다 한 후에야 알아차리고 만다. 그럴 때 마다 뭘 공부했나 싶다.-_-;;)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노자> <장자>에 기대어 이해했듯이 나도 불교를 배우기 전에 <노자> <장자>를 읽지 않았다면 불교를 이해하기 훨씬 어려웠을 것 같다.


처음 <장자>를 번역본으로 읽은 이후에 그에 대한 여러가지 번역본, 연구서들, 안내서들을 읽었었고, 또 한문공부를 위해 원문강독의 교재로서 내편, 외편, 잡편까지 읽어내려 갔었다. 그리고 2018년에, 다시 장자를 집어 들었다. 


왜 그렇게 장자에 매료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 가장 좋은 처방약은 <노자>나 <장자>였던 것 같다. 그 10년 사이 한문 뿐만이 아니라 불교, 인류학, 역사학,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경제학, 과학 등 여러가지 공부를 했었는데 폴라니의 말대로 인간을 통째로 갈아버린 "사탄의 맷돌"을 멈추게 하려면 전반적인 인식의 대전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공정한 세상"을 외치더라도 서로 이익을 뜯어먹는 사회에서는 "공정"이 불가능하다. 예를들어 국가가 육아를 책임지겠다고 정치인들은 공언하지만 사실 지금 그 육아를 실제로 책임지는 엄마나, 어린이집 교사들이나, 보육사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는 얼마나 해주고 있는가? (뭘 해주면 공정할까?) 이들에 대한 휴식과 근무시간에 대한 보장없이 아이를 좀 맡아달라고 하는 것이 내 힘든거 남에게 미뤄 버리는게 아닌가? 그리고 왜 육아는 엄마와 국가가 책임지는가? 아빠는 뭐하고? 아빠들은 왜 경력을 단절해가면서까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지? 약하고 보드라운 생명체를 둘이 낳고서 혼자 책임지고 애면글면 하는 건 "공정"한 건가? 아이 돌봄을 아내나 다른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좀 떠맡겨 버리겠다는 심보가 "공정"한건가? 남자들도 아빠가 되면 당연히 휴직해야 한다면, 그래서 차별받는다면 그 "남자"들이 이런 차별을 그대로 뒀겠는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식의 유리천장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오감으로 감각하는 것으로 알게된 사실들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것은 인간의 신체를 타고난 경우에 그러하다.불교에서 그것은 이렇게 말해진다. 물은 아귀에게는 고름으로,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사람에게는 마시는 것이나 씻는 것으로, 천상의 사람에게는 유리나 수정으로 보인다고 한다.(일수사견一水四見) 무엇이 물의 본질인가? 인간은 자신에게 유용한 물에 대한 사고밖에 할 줄 모른다. 


폴라니식으로 하면 사탄의 맷돌에서 갈려나온 이들은 내가 벌어서, 내가 쓰고, 내가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어도 어쩔 수 없다...라고. 노동해서 먹고 사는 거, 상품 팔아서 이득 남기는 거, 그거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는가?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렇지만 폴라니나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인간이 그렇게 노예노동에 시달리면서 먹고 산 것은 오직 자본주의 시대에만 그러했다. 이 시대가 이상한 것이다. 중세 농노도 우리보다 적게 일했다. 매월 돌아오는 축제를 즐기고 놀았다! 우리의 인식체계란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시대적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세례 속에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는 당연히 대안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인식론적 한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그 속에서는 풀지 못한다. 심지어 "뭐가 문제지?"라는 말조차 한다. (애를 엄마가 키우는게 뭐가 문제지?"하는 사람 많다!) 상품사회에서, 근면하게 일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원래 해오던 대로"의 성역할에 충실한 채로,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 어렵다. 그래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인지 모르나 그 "작은" 행복마저도 뚝심있게(?) 추구하려면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내 행복을 위해서 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만은 중지하지 해야 하지 않을까? 붓다처럼 위대한 전환을 이룬 인간은 될 수 없어도 푸코의 말대로 우리는 투명한 유리창에 가서 부딪혀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자기에게 이미 씌어진 안경을 자꾸 다른 도수로 맞춰보는 것, 이미 조율된 소리를 새롭게 조율해보는 시도, 이런 것이 없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거짓말이다.


나는 <노자>나 <장자>가 그런 새로운 대안과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줄 오래된 미래 비책이라 생각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마리아 미즈가 자신이 숱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동양의 도가적 생태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는 글을 봤을 때 나는 환호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와 좁디좁은 인식체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학문은 불교와 도가밖에 없다. 그리고 최신의 과학이론이 여기에 보탬이 된다.


한문공부를 하면서 <장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훨씬 많이 <논어> <맹자>를 읽었다. 강의도 했었고, 시험도 보고, 세미나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읽으면 읽을수록 화딱지(?)가 나면서 답답한 부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문"하면 <논어> <맹자>부터 생각할까? 옛날부터 과거시험 교재였으니 공부해야했고, 가르쳐야했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로서 정제된 단어들과 문장들이 한문공부에 맞춤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사상, 그 효제충신과 인의예지의 사상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가의 사상은 "중간관리자"의 학문이다. 맞다. 바로 그거였다. 조정에 나아간 관리자들이 백성을 교화하고 임금을 잘 인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그래서 출세와 영 거리가 먼 내가 읽다보면 지겨운 느낌.. 네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인건 알겠는데요...라고 하고 싶은 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거였다. 나는 <담론>을 읽으며 그 부분에서 무릎을 딱!쳤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지금, 이 단단했던 가부장제의 인식틀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는 틈새와, 정상적인 이상한 가족들이 힘써 가족의 틀을 유지하려하지만 점점 어려워져가는 이 시점에, 그리고 다시 돌아온 정상적인 정부가 "공정"을 외칠 때마다 "나는 부당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은 <노자> <장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때,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뭘 그리 열심히? 그냥 산책하고 한 숨 자! 무용하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봐. 넌 뭘 그리 쪼잔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냐? 그렇게 살다 죽는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연구자들은 장자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버린 고독자"(이마미치 도모노부) "초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리우샤오간) "개인적 삶을 선호하는 국외자들을 위한 저작"(앵거스 그레이엄)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강신주)


나는 장자가 세상을 등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자가 혼자였다면 주류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장자를 내친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국시대의 피폐한 사람들의 삶을 정확히 분석했다. 부자가 되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재상이 되려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출세의 길을 걷다가 죽고, 병들고, 자기만 그러는게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 전쟁에 끌고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고통속에 신음했다. 장자는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고자 했다. "출세는 너들이나 하세요. 저는 이렇게 살랍니다." 그리고 역설과 조롱, 유머를 곁들여 그 출세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유용"하다. "무용"한 것의 쓸모를 말했던 장자의 사상이 이제와 이렇게 "유용"하다니! 진정 무용지용(無用之用)인걸까? <장자>는 이렇게 사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은 없는지 너무 답답한 분들을 위해 준비된 오래된 미래보고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상상력이 부족한 분들을 위한 비책" (유엔 미래보고서가 지금 시대를 바탕으로 예측하는 것이라면 장자의 미래보고서는 기본에서부터 확~ 바꿔드립니다. 단, 변화를 기쁘게 받으신다면)


2018년 <장자>는 "토요일N책" 멤머들과 함께 읽었다. 그간 블로그, SNS, 홈피, 등 인터넷에 글쓰기는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지만 매주 토요일에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 나눴던 것들을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알라딘에 저절로 생성된 공간에 적어두기로 했다.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번역은 근엄하게 하지 않겠다. 구어체 스타일의 장자를 구어체식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전국시대를 살았던 그가, 지금도 변함없이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는지,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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