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생각해보니 10년만에 다시 장자를 읽는다. 처음, 그 붕새의 비상을 읽고서 느꼈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이게 철학서라고?" (내용 뿐 아니라 책의 물리적 두께도 압도적이었다. 번역본은 거의 벽돌수준으로 두껍다. 두께로 사람을 압도하는 책 중에 하나가 <장자>다.)
<장자>의 내용은 신화나 우화집 같은 이야기였지만 읽는 구절마다 나의 고정관념과 자기중심주의, 어리석은 시비판단에 대해 정곡을 찔러대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는 자각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 읽다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날카로운 지적들, 덕분에 편협한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 좀더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해야하나?(물론 그런 힘이 생겼어도, 언제나 어리석은 짓을 다 한 후에야 알아차리고 만다. 그럴 때 마다 뭘 공부했나 싶다.-_-;;)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노자> <장자>에 기대어 이해했듯이 나도 불교를 배우기 전에 <노자> <장자>를 읽지 않았다면 불교를 이해하기 훨씬 어려웠을 것 같다.
처음 <장자>를 번역본으로 읽은 이후에 그에 대한 여러가지 번역본, 연구서들, 안내서들을 읽었었고, 또 한문공부를 위해 원문강독의 교재로서 내편, 외편, 잡편까지 읽어내려 갔었다. 그리고 2018년에, 다시 장자를 집어 들었다.
왜 그렇게 장자에 매료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 가장 좋은 처방약은 <노자>나 <장자>였던 것 같다. 그 10년 사이 한문 뿐만이 아니라 불교, 인류학, 역사학,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경제학, 과학 등 여러가지 공부를 했었는데 폴라니의 말대로 인간을 통째로 갈아버린 "사탄의 맷돌"을 멈추게 하려면 전반적인 인식의 대전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공정한 세상"을 외치더라도 서로 이익을 뜯어먹는 사회에서는 "공정"이 불가능하다. 예를들어 국가가 육아를 책임지겠다고 정치인들은 공언하지만 사실 지금 그 육아를 실제로 책임지는 엄마나, 어린이집 교사들이나, 보육사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는 얼마나 해주고 있는가? (뭘 해주면 공정할까?) 이들에 대한 휴식과 근무시간에 대한 보장없이 아이를 좀 맡아달라고 하는 것이 내 힘든거 남에게 미뤄 버리는게 아닌가? 그리고 왜 육아는 엄마와 국가가 책임지는가? 아빠는 뭐하고? 아빠들은 왜 경력을 단절해가면서까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지? 약하고 보드라운 생명체를 둘이 낳고서 혼자 책임지고 애면글면 하는 건 "공정"한 건가? 아이 돌봄을 아내나 다른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좀 떠맡겨 버리겠다는 심보가 "공정"한건가? 남자들도 아빠가 되면 당연히 휴직해야 한다면, 그래서 차별받는다면 그 "남자"들이 이런 차별을 그대로 뒀겠는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식의 유리천장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오감으로 감각하는 것으로 알게된 사실들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것은 인간의 신체를 타고난 경우에 그러하다.불교에서 그것은 이렇게 말해진다. 물은 아귀에게는 고름으로,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사람에게는 마시는 것이나 씻는 것으로, 천상의 사람에게는 유리나 수정으로 보인다고 한다.(일수사견一水四見) 무엇이 물의 본질인가? 인간은 자신에게 유용한 물에 대한 사고밖에 할 줄 모른다.
폴라니식으로 하면 사탄의 맷돌에서 갈려나온 이들은 내가 벌어서, 내가 쓰고, 내가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어도 어쩔 수 없다...라고. 노동해서 먹고 사는 거, 상품 팔아서 이득 남기는 거, 그거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는가?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렇지만 폴라니나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인간이 그렇게 노예노동에 시달리면서 먹고 산 것은 오직 자본주의 시대에만 그러했다. 이 시대가 이상한 것이다. 중세 농노도 우리보다 적게 일했다. 매월 돌아오는 축제를 즐기고 놀았다! 우리의 인식체계란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시대적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세례 속에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는 당연히 대안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인식론적 한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그 속에서는 풀지 못한다. 심지어 "뭐가 문제지?"라는 말조차 한다. (애를 엄마가 키우는게 뭐가 문제지?"하는 사람 많다!) 상품사회에서, 근면하게 일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원래 해오던 대로"의 성역할에 충실한 채로,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 어렵다. 그래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인지 모르나 그 "작은" 행복마저도 뚝심있게(?) 추구하려면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내 행복을 위해서 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만은 중지하지 해야 하지 않을까? 붓다처럼 위대한 전환을 이룬 인간은 될 수 없어도 푸코의 말대로 우리는 투명한 유리창에 가서 부딪혀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자기에게 이미 씌어진 안경을 자꾸 다른 도수로 맞춰보는 것, 이미 조율된 소리를 새롭게 조율해보는 시도, 이런 것이 없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거짓말이다.
나는 <노자>나 <장자>가 그런 새로운 대안과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줄 오래된 미래 비책이라 생각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마리아 미즈가 자신이 숱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동양의 도가적 생태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는 글을 봤을 때 나는 환호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와 좁디좁은 인식체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학문은 불교와 도가밖에 없다. 그리고 최신의 과학이론이 여기에 보탬이 된다.
한문공부를 하면서 <장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훨씬 많이 <논어> <맹자>를 읽었다. 강의도 했었고, 시험도 보고, 세미나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읽으면 읽을수록 화딱지(?)가 나면서 답답한 부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문"하면 <논어> <맹자>부터 생각할까? 옛날부터 과거시험 교재였으니 공부해야했고, 가르쳐야했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로서 정제된 단어들과 문장들이 한문공부에 맞춤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사상, 그 효제충신과 인의예지의 사상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가의 사상은 "중간관리자"의 학문이다. 맞다. 바로 그거였다. 조정에 나아간 관리자들이 백성을 교화하고 임금을 잘 인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그래서 출세와 영 거리가 먼 내가 읽다보면 지겨운 느낌.. 네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인건 알겠는데요...라고 하고 싶은 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거였다. 나는 <담론>을 읽으며 그 부분에서 무릎을 딱!쳤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지금, 이 단단했던 가부장제의 인식틀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는 틈새와, 정상적인 이상한 가족들이 힘써 가족의 틀을 유지하려하지만 점점 어려워져가는 이 시점에, 그리고 다시 돌아온 정상적인 정부가 "공정"을 외칠 때마다 "나는 부당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은 <노자> <장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때,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뭘 그리 열심히? 그냥 산책하고 한 숨 자! 무용하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봐. 넌 뭘 그리 쪼잔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냐? 그렇게 살다 죽는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연구자들은 장자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버린 고독자"(이마미치 도모노부) "초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리우샤오간) "개인적 삶을 선호하는 국외자들을 위한 저작"(앵거스 그레이엄)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강신주)
나는 장자가 세상을 등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자가 혼자였다면 주류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장자를 내친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국시대의 피폐한 사람들의 삶을 정확히 분석했다. 부자가 되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재상이 되려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출세의 길을 걷다가 죽고, 병들고, 자기만 그러는게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 전쟁에 끌고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고통속에 신음했다. 장자는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고자 했다. "출세는 너들이나 하세요. 저는 이렇게 살랍니다." 그리고 역설과 조롱, 유머를 곁들여 그 출세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유용"하다. "무용"한 것의 쓸모를 말했던 장자의 사상이 이제와 이렇게 "유용"하다니! 진정 무용지용(無用之用)인걸까? <장자>는 이렇게 사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은 없는지 너무 답답한 분들을 위해 준비된 오래된 미래보고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상상력이 부족한 분들을 위한 비책" (유엔 미래보고서가 지금 시대를 바탕으로 예측하는 것이라면 장자의 미래보고서는 기본에서부터 확~ 바꿔드립니다. 단, 변화를 기쁘게 받으신다면)
2018년 <장자>는 "토요일N책" 멤머들과 함께 읽었다. 그간 블로그, SNS, 홈피, 등 인터넷에 글쓰기는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지만 매주 토요일에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 나눴던 것들을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알라딘에 저절로 생성된 공간에 적어두기로 했다.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번역은 근엄하게 하지 않겠다. 구어체 스타일의 장자를 구어체식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전국시대를 살았던 그가, 지금도 변함없이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는지,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