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참 곱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표지를 제하고 나니 '夢幻'이라는 단어와 딱 들어맞는 하드커버가 나온다. '몽환화'라고 되어있는데, 어째서 나팔꽃이 그려져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 이 꽃이 나팔꽃이 아닌 다른 종류의 꽃인가 잠시 갸우뚱. 워낙에 곳곳에 복선을 깔아 두는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는것을 알기에 그의 작품을 읽을때는 신경을 바짝 세우는데도 불구하고 또 그의 글발에 처음에 가졌던 생각은 간곳없어지고 넘어가는 책장 속도를 눈이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상관 관계를 찾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두편의 프롤로그. 출근길에 이유없는 죽음을 맞은 부부와 살아남은 여자아이. 열네살 소타에게 찾아 온 첫사랑의 이유 없는 헤어짐.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나하는 짧은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남을 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하면서 단서를 찾겠다는 생각은 이미 물건너가고 그저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책 속 인물들을 따라가기에 바빠진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핵가족화가 되면서 가족간의 만남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리노가 할아버지를 사촌의 장내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말이다. 음악을 하던 나오토의 죽음과 각광받던 수영선수에서 평범한 대학생이 된 리노를 바라보면서 할아버지의 마음이 편할리가 없겠지만 할아버지는 역시 큰 산처럼 계신 분이다. "정답은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결론을 빨리 내려고 하지 마라.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는 네 편이란다. 계속 응원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p.38) 할아버지가 이렇게 손녀를 배려해주시니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웠을까? 장례식 이후 리노는 꽃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키워놓은 꽃들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다. 매달 몇번씩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찍어놓으신 사진도 블로그에 하나둘씩 올리면서 리노의 단조롭고 무의미하던 삶이 조금씩 바끼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슈지가 다가와 화분을 들여다봤다. "이 녀석은 아직 뭐가 나올지 모르겠구나." (p.43)
무명씨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화분의 존재가 어떤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리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꽃은 공개하면 안 된다....그랬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질 거다. 이건 당분간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 괜찮지?" (p.48). 분명 괜찮아야만 했는데, 할아버지가 살해되셨다. 할아버지의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리노. 그리고 사건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을 피운 화분과 리노를 찾아 온 보타니카 엔터프라이즈의 가모 요스케. 할아버지의 죽음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는 피웠다 사라져버린 노란 꽃. 모두들 한 목소리로 위험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위험이 있기에 이렇게 위험하다고 나직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걸까? 뜬금없는 인물 가모 요스케의 등장은 두번째 프롤로그를 떠오르게 하면서 이제 독자들을 흥분시키게 한다. 첫사랑에 가슴아파하던 소타, 소타와 열살 넘게 차이나는 형, 요스케. 뭔가가 시작되는 걸까?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글을 월간 <역사가도>에 연재한것이 십년 전이란다. 연재가 끝나고 수차례 개고를 거쳐 이렇게 출간되기까지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다작하기로 유명한 그를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어마어마한 시간일텐데,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 현재의 배경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로 되어있다. 뜬금없다 싶지만,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열네살 소년, 소타가 원자력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나오면서 리노의 할아버지인 아키야마 슈지의 사건과는 별개로 소타의 가족사가 또 다른 축을 이루기 시작한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은 씨실과 날실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잘 짜여진 플룻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십여년 전 나팔꽃 시장을 돌며 첫사랑에 가슴아려했던 소년이 엘리트의 코스처럼 여겨지는 원자력을 공부하지만 2011년의 원전사고는 터부시되고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꿈의 에너지라 여겨졌던 원자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륵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소타가 등장을 한다.
노란 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가모 요스케를 찾던 아키야마 리노와 형의 비밀스런 뒷이야기가 궁금한 가모 소타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들의 전문 탐정 버금가는 추리는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이들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면에서 사건을 맡은 형사 하야세가 접근하기 시작한다. 불륜으로 별거중에 있으면서 가족 붕괴의 위기에 처해있지만, 여전히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붙들고 싶은 하야세에게 아키야마 슈지는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아들 유타의 은인이었고, 그 은인의 죽음은 유타의 말문을 트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아들과 은혜를 갚고 싶은 아버지. 그리고 그들 앞에 드러나는 노란꽃의 비밀. 과거에는 노란 나팔꽃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분명 역사 속 나팔꽃은 노란색이었단다. 노란 나팔꽃을 본적이 없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라색말고 다른 색이 있었던가? 흰색은 본 기억이 나는데, 다른 색은 기억에 없다. 아침나절 활짝 피었다, 저녁무렵이면 살포시 지는 나팔꽃이 노란색이라면 그 또한 기묘하리만치 아름다울 것 같긴하다.
"어떤 씨앗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라질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야. 노란 나팔꽃이 사라진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야." "노란 나팔꽃은 금단의 꽃이라는 이야기야." (p.219)
현존하는 나팔꽃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카로티노이드 계열의 색소를 가진 환상의 꽃. 아키야마 슈지가 키워낸 꽃이 정말 금단의 꽃이었을까? 꽃의 존재를 믿지 않은 사람들과 꽃의 존재를 덮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에서 꽃이 아닌 다른것을 탐하는 이들. 1962년 9월의 아침, 주택가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인사건이 왜 'MM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지는지, 에도가와 막부시대부터 메이지 새 정부까지 은밀하게 재배되어지던 꽃의 이야기는 복선으로 깔렸던 소타와 리노의 활약을 칭찬이라도 하듯이 요스케에 입을 통해서 나오고, 사건을 하나씩 쫓아가던 소타는 둔탁한 둔기에 맞은 것처럼 멍해질 수 밖에 없어진다. 혼자만의 생각은 오류를 범할때가 많다. 자신만이 외톨이라 생각했었기에 가족을 기피하던 그에게 가족의 행동은 이해 불가였을테니 말이다. 노란꽃 끝에 밝혀지던 'MM사건'의 생존자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으로 다가온다. 그런 사실과 함께 작가는 꽃의 씨를 뿌리듯 소설 속 곳곳에 숨겨 둔 장치들을 한꺼번에 개화해서 '가족애'라는 씨를 퍼트리게 만들어 버린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p.419)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치부되어 버렸을 사건은 '노란 꽃'을 매개체로 해서 리노의 이야기, 소타의 이야기와 하야세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모이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만난 열네살 소년의 첫사랑은 어린 자아에 갇혀있던 소타를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어 주고, 어른이 된 소타는 자신이 갈길을 찾기 시작한다. 미래의 에너지로 생각하고 청춘의 시간을 바쳤던 소타가 감내해야하는 현실은 에도 막부시대부터 마취약으로 사용했던 꽃을 은밀하게 자백제로 사용하기를 권했던 가모 오키쓰구를 거쳐 가모 요스케와 이바 가문의 이바 다카미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으로 묶어 두었고, 그 끈을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 그와 함께 자신을 과소평가하던 리노 역시 죽은 사촌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된다.
지금까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과는 분명 다르다. 흥미로 다가왔다가 묵직함이 가슴을 눌러준다. 이웃나라 이야기 이기에 가슴 졸이면서도 그들의 대처에 분통해 하던 '원전 사고'라는 미묘한 문제들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이 있다'라고 말이다.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는 사람들과 분명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내던져진 무서운 선택을 수십 년 전에 이미 내려버린 나라의 원자력발전으로 부터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소타같은 이들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숨을 쉬고 살수 있는 곳으로 존재하는 것일것이다. 그리고 놓아버린 꿈을 다시 잡기위해 땀흘리는 젊음은 금단의 꽃보다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는 오랜만에 만난 또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