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이십대 초반에 읽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어떻게 표현을 해야될지 모르겠다.  지금은 대략적인 내용 흐름만 남아 있지만, 당시엔 꽤 많은 시간동안 책속에 빠져 있었고, 책을 읽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그 책을 읽는 모습을 봤을땐,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후로 김진명 작가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의 수많은 책들이 내 책장안에 자리잡는 것을 보면서 흐믓해하고, 책등을 만지면서 연애를 하듯 설레였으니 말이다. 『글자전쟁』은 당연히 김진명이기에 읽고 싶은 책이었다.  『고구려』이후 현대물로 나온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한 단어의 글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김진명 작가만큼 뛰어난 사람을 못보았기에 더욱 궁금했었다.  몇해전에 만났던 『천년의 금서』를 떠올리는 사람은 분명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韓'을 통해 역사 속 현재와 과거속을 종횡무진했던 그가 이번엔 '畓'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찾아왔다.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소설속 또 다른 소설.  액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TV브라운관을 통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나는 것 처럼 새롭다.  그러면서도 TV속 인물들화 되는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어느것이 이야기이고 어느것이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될때가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흥미롭고 가독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이야기 하나.  스탠퍼드 출신의 명망 있는 국제 무기중개상 이태민. 수재임이 분명한 태민은 모두가 우러르는 명예보다는 500억으로 편안한 인생을 살고픈 남자다.  누구도 자신을 무시못하게 하고 싶고, 그저 안락함과 도도함으로 살고 싶은 남자.  '국제무기중개상'이라는 이력이 너무나 당당한 이 남자는 무기제조업체 '록히드마틴'에 입사한 지 2년도 안 되어 헤비급 사원이 되었다.  조국의 안위따위는 개나 줘버려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칠수 있는 사람.  이 남자에게도 시련은 온다.  그의 시련은 지금까지 모았던 돈이 사라지는 것.  그뿐이랴. 교묘한 법망으로 중국으로 도망까지 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돈은 또 모으면 된다.  이 남자에겐 비상한 두뇌와 국제정세를 꿰뚫는 날카로움이 있으니까.

 

중국으로 도피한 태민.  중국이란 나라는 참 묘하다.  대한민국도 북한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곳에서 만난 비밀에 싸인 남자, 킬리만자로.  평상시의 태민이라면 이 남자와 엮였을리가 만무할텐데, 인생은 알수 없다.  킬리만자로가 태민에게 건네 작은 USB 하나. "중국의 치명적 약점이예요." (p.77). 해킹 염려가 있다면서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한마디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태민에게 건넨 USB안에 들어있는 소설 하나가 태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한다.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그냥 넘겨버리면 이야기는 사장되고 없어진다.  호기심은 그런 사장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태민에게 건내진 USB는 그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라고 부추기고, 판도라의 상자는 열라고 있는 것이니,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어야 판도라의 상자지, 열지 않으면 그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인지, 그냥 상자인지 누가 알겠는가?  

 

"차라리 전쟁은 어떻겠느냐.  내가 군사를 일으키겠다.  저 귀신의 자손을 모조리 죽인다면 어떻겠느냐. 나는 그럴 자신이 있다."(p.88)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또 다른 이야기. 묻으면 될것이 아니냐고 이야기를 한다. 묻고 태우고 없애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데, 그 이야기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프롤로그를 지나자 마자 보여지는 이야기, 정만현 태수 안망.  안망의 관할인 아야촌의 주민이 모두 죽었다. 집단적이고 고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살수에게.  아야촌의 참사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산속 작은 마을 내터까지 이어져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난다.  작은 마을에 중심에 있는 무당.  서맥족이라 불리며 풍장을 하는 풍습이 있는 마을에 활을 든 아이.  매장을 하는 풍습이 아닌 시체를 나무위나 바위에 눕혀 온전하게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사람들과 부모의 시체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활을 메고있는 아이.   서맥족에게서 사라져버린 글자를 찾아라.

 

국상 을파소가 움직였다.  글자를 찾기위해서는 글자를 만들어라.  사라져버린 글자.  무지한 이들도 만들수 있는 글자 '조(弔)'.  중국인들이 쓰는 글자, 입구(口)에 수건건(巾)을 두른 '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순하게 한자는 중국인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던 안망에게 새로운 시각이 뜨여지기 시작한다.  '弔'를 없애기 위해 움직인 범인이 유교적 사상을 앞세우고 선비정신이 투철한 석정으로 밝혀지면서 안망과 주민들은 알수 없는 두려움에 맞서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글자 '답(畓)'.  논을 뜻하는 畓이 우리만 쓰는 글자일까?  수전(水田)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사용하지 않고 있나?  태민이 읽은 USB속 소설은 답을 내놓지 못한 상태로 끊겨졌다. 한자를 천하에 빌려주었다는 한족의 한나라에 대해 동이족의 고구려가 한자의 근원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며 대립이 시작되는 순간 끝나버린 소설.     

 

이 비상한 두뇌를 가진 수재는 궁금함을 풀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의 일에 절대 관여하는 일 없이 살아온 태민이 생전 처음 남의 일로 가슴이 아프고, 킬리만자로라 불리던 소설가 전준우가 추구하던 이야기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모든 한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화하족.  하지만 한족에게는 논 답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한자를 한족만이 만들었다고 할 것인가?  태민이 만난 치엔 교수는 '논 답'은 제대로 된 글자가 아니라고 치부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태민.  무기거래상으로서의 탄탄대로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여겼던 최현지 검사가 그의 이견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전쟁속에서 살아가던 태민에게 전준우가 남겨놓은 소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전쟁보다 더 큰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태민의 선택이 어떤것인지는 알 수 없다.  500억을 손에 넣으면 최현지 검사에게 복수하겠다던 태민에게 500억은 눈앞에 있는 것 같고, 그렇게 꿈꾸던 소살리토 언던 위 저택도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게 정말 태민의 꿈일까?  어린시절 아이들에게 많은 경험을 갖게 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진정한 꿈을 찾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가지만 보면 하나의 꿈만 꿀 수 있지만, 백가지를 보고 경험하면 백가지의 꿈을 가질 수 있다.  오직 한 길.  500억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태민에게 사마천과 을파소라는 역사 속 인물을 등장시킨 미완성의 소설은 태민에게 또 다른 길과 꿈을 보여주고 있다.  그길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나 걷지 않은 길은 미련으로 남게된다.  독자 입장에서야 태민이 길을 걷길 바래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다.  그가 그 길을 걸어서,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는 미지수이니 말이다.  다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弔와 畓은 궁금하게 만든다.  동이족과 은의 관계 역시 그렇다.  내가 알고 있던 역사의 진실은 어떤것일까 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