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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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전염된다.  아니, 모든 인간이 마음속에 깊이 숨겨 가지고 있는 악, 말하자면 잠복하고 있는 악을 표면화시키고 악행으로 나타나게 하는 '마이너스의 힘'은 전염된다고 할까.' p.454

 

 

암흑의 제왕 사우론의 힘의 원천인 동시에 분신인 '절대반지'를 통한 악의 전염은 인격뿐만 아니라 용모까지 바꾸어 버린다. 『반지의 제왕』으로 만났던 악의 원친은 이런 힘이었고, 절대반지 속에만 악이 존재하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  기독교 역사속에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 예수님의 죽으심을 똑같이 따를수 없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베드로는 그렇게 사랑하고,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예수님을 닭이 울기 전 세번이나 부인했다.  예수님의 체포현장에서 뿔뿔이 도망쳐 버린 다른 이들보다야 용감하다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베드로에겐 자신을 감춘 행위였고, 예수님을 부인하는건 기독교 사상으로는 '죄'다.  그러기에 렘브란트의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초상은 강렬한 그림이 아님에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미야베 미유키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악은 과연 전염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3탄으로『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내놓았다.

 

『누군가』,『이름 없는 독』을 이어 7년만에 돌아온『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으로 시리즈를 만들어 낸 '행복한 탐정'은 위험에 빠진 재벌가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평범한 출판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가 재벌 총수인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 사보를 만들면서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스기무라가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며 해결해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스기무라에 관한 세번째 이야기인 이번 작품은  전작들을 통해서 만났던 인물들이 간간히 얼굴을 내어 밀면서 전작과의 이야기 흐름을 이어주고 있지만, 전작을 읽지 않고 이번 작품만 읽어도 막히는 부분은 없다.  863페이지나 되는 막대한 양의 책 속에 전작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으니 말이다.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책을 읽는 재미는 톡톡하고, 요즘 흔히 사용하는 것처럼 '상','하'나 1.2권으로 나뉘어 있지 않아서 금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평범한 기업 사내보 편집자라고 하기에 스기무라 사부로는 엄청나게 사건들을 몰고 다닌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탄 버스가 통째로 납치되고, 납치범이 자살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테니 말이다.

 

버스에 탔다가 인질이 돼 버린 승객들과 운전기사, 그리고 납치범.  약한 노인처럼 보이는 인질범을 누구도 대적하지 않고, 심지어 인질범의 말솜씨에 편집장인 소노다 에이코를 제외한 승객들은 노인에게 지배당하고 컨트롤당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있는 사코타 할머니, 버스 기사인 시바노, 편집장인 소노다를 버스밖으로 보낸후 자신의 이름을 사토 이치로라 밝힌 인질범은 경찰에게 세명의 인물을 데리고 오라고 하고, 인질이 된 스기무라, 사카모토, 다나카, 마에노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노인의 입장에서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사토 이치로가 이야기하는 모종의 위자료는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꿈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엄청난 부자 영감님의 객기일까?  영감님은 엄청난 위자료를 이야기하면서 인질이 된 승객들의 맘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한다. 경찰의 습격과 노인의 죽음이 있기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밝혀진 노인의 실체는 빈털털이의 독고노인이었다.  이걸로 끝이 났다면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사건을 몰고다니는 스기무라에게 설마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나겠는가?  

 

거의 900페이지에 가까운 미미 여사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200페이지가 넘어선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기사 시바노 가즈코, 승객 사코타 도요코, 승객 다나카 유이치로, 승객 스기무라 사부로, 승객 사카모토 케이, 승객 마에노 메이, 승객 소노다 메이코'  이 승객들, 인질이었던 이들에게 돈다발이 소포로 전해졌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사토 이치로.  이 돈은 도대체 어떤 돈이란 말인가?  위자료라고 했으니 사용해도 되는 돈인지, 신고를 해야하는지. 그보다 부자라고 여겼던 사토씨가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받아도 되는 돈이긴 한건가?  하나의 유대관계로 맺어졌지만, 각각의 사정이 있는 이들은 고민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행복한 탐정님은 장인어른의 특명을 받고 일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사이에 스기무라는 전작에서 만났던 사립탐정, 기타미의 유족들과 관련된 일들을 알게 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같아 보이던 이야기의 물길들이 하나의 큰 물길이 되어 돌아온다.

 

북스피어 창립 10주년 기념 ‘르 지라시’ 특대호를 통해서 미미 여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부모님 집에서 정수기를 파는 전화를 받았단다. '정수기를 파는 전화인 줄 알고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음이온이 나온다든지 여러 모로 좋은 점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한데 뒤로 갈수록, 암도 낫는다는 둥 고혈압과 당뇨병도 쉽게 고친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었다가 '새빨간 거짓말!' 하고 끊어버렸지요.'  얼토당토 않다고 제3자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겪은 일이라면, 그 일로 인해서 삶을 포기할 지경까지 놓이게 된다면 이일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 아닌, 직면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편집장인 소노다의 숨겨진 이야기, 사토 이치로로 불렸지만 구레키 가즈미쓰였고, 하다 미쓰아키였던 밋짱의 이야기, 사립탕점인 기타미씨와 연결되어 있던 아다치 노리오의 이야기까지 각각의 일들이 결코 각각의 일이 아닌 지금 이 시대에 흐르는 악의 풍토로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해결이 모든것의 해결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하나를 뿌리 뽑았다고 해서 밭에 있는 잡초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어느 사이에 악은 또 다른 악의 씨앗을 어딘가에 뿌려두고 있다. 그뿐인가? 사건을 몰고다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깔끔하게 사건을 해결해버리는 스기무라에게도 해결못할 일이 생겨버리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릴 수도 있고, '행복한 탐정'시리즈가 스기무라에 변화로 인해서 진짜 탐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조곤조곤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호코는 스기무라에게 이야기를 던져버리고 사라지는 걸까?  공주님이라 그런가?  물론, 속 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스기무라 역시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으니,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프롤로그를 통해서 이야기의 새로운 결말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니 말이다. 

 

"버스가 서 있던 공터 구석에 버려져 있었거든요.  손잡이와 안장이 빨간색인, 작은 자전거였습니다.  버스 문의 유리 너머로, 제게는 잘 보였습니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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