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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째 이렇게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한달에 라면 한번 먹으면 많이 먹는 내가 이 책을 읽는 이틀 동안 라면을
몇번을 끓여 먹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시절에 한시를 배우면서 죽순맛에 홀딱 반한적은 있었어도, 라면에 반해서 이렇게 먹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라면맛에 반했다는 표현은 내게 맞지는 않는것 같고, 그냥 책표지를 보곤 라면을 끓이고 있으니 이걸 어쩐다. 물론, 책을
읽는 이틀 동안의 일이었다. 이젠 내 기준으로 몇달치의 라면을 먹어서 인지,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록색 외계인들 앞에 놓여있는
라면 한그릇이라니, 이 얼토당토 않은 표지에 '훅'하고 넘어간 내가 지금은 왜 이리 웃긴지, 글을 쓰면서도 계속 비실 비실 웃고 있다.

김희선 작가의 단편들이 모여있는『라면의 황제』는 정말 묘한 책이다. 어찌보면 발상이 끝내주는 이야기고, 뒤집어 보면 허무맹랑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기에 딱 맞는 이야기다. 책을 다 읽고도 어디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지 모를 땐,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글을 읽어보면 대충 감은
잡지만, 그렇다고 딱 떨어지게 이게 이거구나 하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은가? 큐브를 맞추 듯 딱 떨어진다면 그게 어디
세상사이겠는가? 확신할 수 없는 일들과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 속 이야기들. 여러번 배경으로 나오는 'W시'로 인해서 동일한 배경의
이야기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가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오는 이 묘한 이야기들은 비실거리게 만들면서도 재미있다.
<페르시아양탄자 흥망사 / 교육의 탄생 / 라면의 황제 / 2098 스페이스
오디세이 / 지상최대의 쇼 / 개들의 사생활 / 어느 멋진 날 / 경이로운 도시 /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의 단편들로 엮인 글의
표제작이 『라면의 황제』다. 표제작 답게 가장 많이 떠오르긴 하는데, 어쩌면, 이야기의 연관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가 툭 튀어서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세계와 외계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다른 작품들과 달리, <라면의
황제>는 라면이 '불량식품'으로 낙인찍인 미래에 27년간 라면만 먹은 라면의 달인 김기수의 책 『내 영혼의 라면 한 그릇』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라면 받침대로 사용되던 파본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가는 김기수의 책. 왜 그는 라면을 27년동안 먹었을까? '한
겨울에도 라면 한그릇이면 거뜬하다'는 말이 아니어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사실에 사상을 집어넣고 공론화해서 자신들의 이념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하지만 내게 만두가게 노인의 말이 더 크게 다가오는 건 노인이 들려준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라면 가게를
하니까 하루 세기 라면만 먹은 거지. 난 지금도 하루 세끼 만두만 먹는다고." (p.104)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일까? 시청 집무실에 깔려있던 페르시아 양탄자.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수입되어진 양탄자가 두개가 되어 나타났다. 하나만 수출되었다면 분명 하나는 모조품이라는 이야기이지만, 어느것이 모조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양탄자의 진위 여부를 알아 내기 위해 페르시아까지 가는 이들은 그 진실을 알아 냈을까? 어린시절 주구장창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속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IQ 215의 어린 소년, 최두식은 조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기에 어린 소년은 컴퓨터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으로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해 내야했고, 먼 이국땅에서 알게된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에게서
배운 '인간의 무의식에 비가역적 변화'를 '국민교육헌장'속에 심어 놓는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아... 우리는 그런 시절을 보냈구나. 최두식에
의해서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렇게 태어났구나.
'W시'로 향해보자. W시는 우주선의 출몰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어느날 새벽에
나타난 우주선. 세상은 난리가 났는데, 이 우주선이 별반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루종일 색종이를 뿌리고 아침마다 볼륨을 크게해서 척
베리의 <Johnny B.Goode>를 들려 줄 뿐,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두려움이 평온으로 바껴가면서
그들은 생각을 미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익숙함이 파괴될것이 두려운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지상 최대의 쇼>와 기이한 녹색 생물체인
외계인들을 광합성을 하는 움직이는 식물로 바꾸어버린 <경이로운 도시>는 어쩌면 하나의 연결선상에 놓여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쟁기를 들고 탱크와 맞선 김홍석씨를 반전 시위의 인물로 만들어 버린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까지 W시에선 참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났다.
분명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갑자기 튀어나 온 <개들의 사생활>은 스릴러를 연상시킬 정도로 오싹하게 만들어
버린다. 여행으로 죽음에 위기에서 벗어난 어머니와 유기견들의 엇갈리는 생과 사. 반복되는 장면들은 익숙하게 다가오기에 그냥 스치듯, 아니
투명한 존재이듯 지나친다. 그것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 긴가민가 할때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 역시
그렇다. 생각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김희선 작가는 만들어 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누가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현실에선
벌써 이런 삶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흠뻑 젖어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인식하지 못할뿐. 나만 유일하고, 내게 있는 익숙함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삶이 얼마나 무서운 삶인가? 그래서 돌아보고 현실을 가끔은 이렇게 비꼬아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자가가 말하고 있는 기시감 처럼 말이다. 기시감, 후에 언제고 보았던 것처럼 느껴질, 지금-여기의 우연적 비극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