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을까? - 연산군 vs 박원종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8
이한우 지음, 김경찬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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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조선 왕실에는 비정상적 집권이 네 차례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를 끌어내리고 왕위를 차지한 '왕자의 난', 수양 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과 신하들에 의해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중조반정' 그리고 서인들이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추대한 '인조반정'이 있다.  이중 태종과 세조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비판의 대상이고, 광해군의 경우는 '외교의 달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연산군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폭군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영상물 속에서도 연산군은 폭군이었고 광군이었다. 몇해전에 본 <왕의 남자>라는 영화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그만큼 연산군에 대한 이미지는 폭군과 광군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27대 임금 중 태어날 때부터 임금으로 예정돼어 있던 사람은 많지 않다.  태조에서 연산군까지 아홉 명의 임금만 보더라도 원자에서 임금까지 된 인물은 단종에 이어 연산군이 두 번째 인물이었다.  원자로 나서 세자가 되었다가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그 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연산군은 그만큼 임금으로서의 정통성에는 하자가 없었다. 단 한가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연산군일기>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연산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일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의 28번째 사건은 폭군이 될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느 연산군과 연산군을 몰아낸 박원종에 이야기이다.  

 

  우리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실록이다. 문제는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서 연산군에 관한 기록이 그다지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실록의 모든 내용을 부정할수는 없지만, 이 두 실록이 어쩔 수 없이 '연산군'에 관해서만은 심한 과장과 왜곡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국왕의 잘잘못을을 따지던 사관들도 왕이 바뀌는 혼란스런 상황을 기록할 때는 무너진 왕조나 쫓겨난 임금에 대해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가해 왔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록들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연산군이 쫓겨난 1506년 9월 2일, 박원종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연산군이 쫓겨났어야 하는 '죄목'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연산군은 성품이 포악하고 의심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주색에 빠져 종묘

  사직의 제사를 없애고, 쫓겨난 어미를 추숭하면서 대신드을 많이 죽였으며, 신하들이 간하는 것을 듣 

  기 싫어하여 언관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서모를 때려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내쫓았다.  

 

 

  연산군은 12년 정도 왕위에 있었다.  그 중 3분의 2, 즉 8년 동안은 평범하거나 왕권 강화를 위해, 그리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애쓴 임금으로 <연산군일기>에서는 묘사되고 있다.  연산군을 '폭군'이나 '광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재위 말기에 이야기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경복궁내 경희루 앞의 연못에 만세, 영충, 진사라는 세계의 섬을 쌓아놓고 온갖 종류의 꽃과 희귀한 풀들을 심은 다음, 백성의 배를 빼앗아 타고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과장된 이야기다.  경회루 앞 작은 연못은 베르사유 궁의 후원에 있는 연못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왕권 강화는 정의이고, 신권 강와는 불의'라고 여겼던 것도 사실인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사대사화 중 2개의 사화가 연산군 시절에 일어났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을손이 사초에 쓴것을 보고 사림세력이 화를 입게 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광기를 드런낸 것이 '갑자사화'이다. '무오사화'의 경우에는 조선 사화중에서 가장 적은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갑자사화'는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100명이 죽고, 22명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106명이 유배를 갔다고 되어있다. 사화는 신하들에게 국한된 일이기 때문에 궁궐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정통성있는 왕에 폐위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차 폭정이 심각해지고 일반 백성까지 피해를 당하면서 급속하게 여론이 조성되었고 1506년에 연산군은 폐위된다.  폐위 후 강화도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은 두달 후 역질에 거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8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왜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을까?>이지만 연사군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역사를 알고자 이 문제가 제기 되었을 것이다.  분명 '무호사화'는 훈구파 세력들의 입김이 연산군에게 가해졌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광군'이었던 연산군에게 '김처선'같이 죽음을 무릎쓰고 간언을 했던 이들이 너무나 적었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용기내어 말하지 않고, 임금의 귀를 막아버리는 건 결국 위정자의 모든것을 끊어버리는 길이니 말이다.  연산군같이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는 드물기에 끊임없이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는 책으로 드라마와 영화로 나올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읽고 보면서 우리는 연산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도 관심을 가져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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