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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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증 Portnoy's Complanint  (명) (앨릭잰더 포트노이(1933~)의 이름을 딴 병명)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슈필포겔은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10여년이 넘었는지 모르겠지만, <몽정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중학교 남자 아이들이 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방법으로 성을 배우고, 교생선생님에 대한 아릇한 짝사랑에 가슴 졸이던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장면 장면이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꽤나 충격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저렇게 자라는구나도 느꼈었고,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선했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 먼저 <색즉시공>이라는 슬프게 야한 영화도 접했던 내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1960년대에 발표되었다면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까?  물론,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출판사의 평을 빌리자면 '1969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출간 몇 주 만에 <포트노이의 불평>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필립 로스는 작품의 선정성 논란 속에서 각종 미디어의 가십과 토크쇼 농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책을 둘러싼 격찬과 혹평의 대립 역시 뜨겁고 팽팽했다. 문학비평가 어빙 하우는 “<포트노이의 불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일은 이 책을 두 번 읽는 일”이라고 비난한 반면, 버나드 로저스는 “이 소설이 1960년대 문화의 이정표라는 데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미국 도서관들은 사춘기 소년의 자위행위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상당한 양의 비속어들 때문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금서로 지정했고, 호주에서는 이 책의 수입을 금지했다.'라고 되어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더 하고 싶은것이 인간의 본능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금서는 몰래 유통이 되었던것 같다.  글을 읽다보니 당시에는 외국 작가들의 책을 배로 실어오는 게 상례였는데, 호주에서는 금수 조치되어 펭귄북스는 검열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 인쇄소에서 제작한 다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책을 배본했고, 이 일로 법정에 서기까지 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러니 그 시대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봤다는 것은 진보처럼 느껴졌을것이고, 젊음의 상징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현재에는 이 책에 따라다니는 수식어구가 상당하다. <타임> 선정 100대 소설,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100대 영문소설, <가디언> 선정 ‘모두가 꼭 읽어야 할 소설 100권’ 까지 굉장하고 꼭 읽어야 할 필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선생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벌 떨며 사는 건 더이상 못 견디겠어요! 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온전하게 만들어주세요! 착한 유대인 소년은 이제 됐어요. 남들 앞에서는 부모 비위나 맞추고 혼자 있을 때는 자지나 주물러대고! 이런 건 이제 됐다고요!' (p.58~59)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엘리트 변호사 앨릭잰더 포트노이과 정신과 의사에게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여과없이 들려준다.  만성 변비에 시다릴고, 평소의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보험외판을 하는 유약한 아버지와  자신이 정해놓은 룰데로 살기를 원하는 강합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포트노이는, 늘 부모님 말에 순종하는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툭하면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 빠져들고, 섹스를 꿈꾼다. 게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자신의 말을 듣는 성기를 가지고 시도때도없이 사정을 하는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에게 들려주고 있다.  정신과에서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놀랍기는 하다. 1969년에 발표된 이야기가 아닌가?  분명 과장이 적지 않게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적나라해도 너무 적나라하다. 그렇다고 야한것은 아니다. 

 

  책에 대한 호평들을 보니 날 것 그대로 쏟아놓은 섹스 편력, 분노, 원망, 빈정거림들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겐 확 와닿지 않는다.  문화의 차이일지는 모르겠지만, 억눌리고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포트노이가 엘리트 변호사가 된것도 의아하다.  책은 정말 포트노이의 불평이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문제들을 분출해내고 있고, 독자는 의사의 눈으로 보고 들을 뿐이다.  어쩌면 옮긴이의 말처럼 작가 로스가 만들어낸 차가움과 유머의 공존이『포트노이의 불평』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겐 이렇다 할 느낌이 없다.  어쩌면 옮긴이 처럼 시간이 좀 더 흘러서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 올지도 모르겠다.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웃음은 '펀치 라인'이었으니 말이다.  '펀치 라인'에서 의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배가 아플 정도로 깔깔 거리고 웃었으니 말이다.  단 한줄로 이렇게 웃길 수 있다니 유머러스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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