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여 대소왕은 억울하다고 할까? - 대소왕 vs 추모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
김용만 지음, 이동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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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언제 방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드라마의 스케일과 재미로 한동안 떠들썩 했었다.  드라마 속 주몽은 못하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고, 주몽이 어린시절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함께 살았던 나라의 왕이 금와왕 이었다.  금와왕의 큰 아들, 대소는 언제나 어린 주몽보다 조금씩 뒤쳐져서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인물로 그려졌었는데, 드라마를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알게 된 시절에는 드라마 속 이야기가 모두 진실인 줄만 알았었다.  드라마 속에서 주몽과 소서노의 만남은 어찌나 멋지고 애틋했는지, 그 둘이 언제 다시 만날까 기대하는 재미가 솔솔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드라마 속 주몽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의 역사와 기록의 역사.  역사를 논하는 사실과 기룩 사이의 간극은 후세의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모르고,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역사의 사실들이 다시 태어나기 시작하는 곳, 역사공화국 한국사 법정이 다시 열렸다.

 

 

  항상 주몽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그려졌던 대소가 원고로,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피고로 등장하는 이번이야기는 어떤 사실, 어떤 진실을 들려줄까? 피고는 주몽이라 불리는 추모왕이다.  역사는 분명 '승자의 기록'이다.  고구려가 부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후손들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높여서 영웅으로 만들어 준것은 당연한 일이였기에,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와 적대시되는 적국의 임금으로써 악역으로만 그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화에서는 대소왕과 추모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부여사와 고구려 초기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에 의의가 있을것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탄생설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금와왕이 하백의 딸인 유화를 데리고 와 방에 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어 잉태하여 마침내 알 하나를 낳았고,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고, 소와 말에게 주워도 밟지 않고 피해가서, 다시 어미에게 돌려주었더니 껍데기를 깨고 사내아이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 나온 이야기다.  부여는 왕 아래에 '마가','우가','저가','구가'등의 부족장이 사출도라는 불리는 지방을 다스리는 연맹 국가 였는데, 이들 부족장들이 추모를 보호한것을 이렇게 설화로 만들어낸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책에 기록된 그대로만 역사를 해석하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탄생설화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유아기로 끝나야 한다.

 

  분명 고구려는 우리 역사속에서 강한 나라이다.  하지만, 부여는 어떠한가?  백제의 부여가 아닌 강성한 국가인 '부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스치듯 귓가를 지나가던 나라이름이 아니라, 부여는 우리 역사속에서 당당히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고, 고구려는 부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주몽의 탄생설화나 고구려의 축제'동맹'은 부여의 제천 행사인 '역고'축제를 본뜬 것이었으며, 의복 문화와 주거문화, 음식 문화등도 부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물론, 부여의 무덤 양식이 토광묘였던 것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돌무지무덤, 즉 적성총을 사용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여를 알지 못한다.

 

 

  기원전 3세기경에 건국되어 기원후 494년까지 7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고, 부여에 관한 기록은 부족하다.  부여가 고구려의 어버이된 나라임에도 뒷날 고구려가 부여를 멸망시키면서 부여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부여의 역사가 가려졌기에 부여는 점점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나라가 되어버렸다.  고구려를 펌하하려 함이 아니다.  고구려 위에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부여 또한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룬 나라였음을 알기위해, 그들 역시 우리의 조상이었음을 알기위해 '대소왕 vs 추모왕'의 재판이 열린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재판이 열린것이다.  너무나 찾기 힘든 부여의 역사.  기록되어지지 않는 역사의 행간을 읽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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