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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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에 자정까기 도착하세요. 방에 들어오면 일단 안에서 자물쇠를 잠가요.  그 다음에는 책상에서 뭘 해도 상관없어요  그 대신 모니터에서 눈만 떼지 말아요. (p.99)

 

  제자와의 스캔들로 하루아침에 영화학과 교수에서 빈털터리로 쫓겨난 해리 릭스. 고향인 미국에서 발을 붙일 수 없어 도망치듯이 떠나 온 파리는 그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묵게된 호텔의 낮근무자 부터 그를 열받게 하는것은 하나 둘이 아니었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파리였으니 그를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위기는 파리에서도 계속되어서수중에 남은 돈으로는 겨우 빈민가인 파라디스 가에 단칸방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최대한 절약하며 산다고 해도 겨우 두서너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그에게 일자리가 찾아들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 안되는 일. 그저 그에게 유일한 희망인 소설쓰기가 가능한 곳. 하루에 500단어씩 써 나가면 일 년이 가기 전에 책 한 권을 끝낼 수 있을 것이고, 소설이 성공하면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망에 내몰린 그를 달래주는 유일한 위안이되어가고 있었다.  자정에서 새벽까지.  소설을 쓰고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직장이 또 있겠는가?  그냥 못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기만 하면 만사 OK일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파리 6구에 있는 허버트 부인의 살롱을 찾는다.  이제 외로우니까.  


담뱃불이 밝게 타오르더니 발코니 아래로 맴을 돌며 떨어졌다.  담배를 던진 여자가 어둠 속에서 나왔다.  달빛을 받은 여자의 자취가 드러났다.  나이는 중년쯤 돼 보였지만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달빛이 여자의 얼굴을 비추자 목에 난 긴 흉터가 보였다. 수술 자국 같았다. 20년 점난 해도 남자깨나 따랐을 미모였다. (p.128) 

 

  파리 6구의 살롱에서 낯선 여인을 만나면서 그의 생활이 바뀌기 시작한다. 마지트.  일주일에 두 번 그녀를 만나는 것이 그에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어 버렸다. 헝가리 태생으로 일곱살에 파리에 와 시민권을 획득한 번역가로 나이가 쉰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관능적이면서도 지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마지트. 마지트를 만나면서 해리는 차츰 고독감에서 벗어나고,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각자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와 함께 해리를 괴롭혔던 인물들이 하나씩 사고를 당하기 시작한다.  터키이민자들이 대부분인 파라디스 가에서 기거하고 있는 해리는 형사들에 눈에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그가 용의자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해리가 구한 직장이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스릴러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파리 5구의 여인'이라고 제목을 읽고 나서도 마지트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책표지에 모든것이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매력적인 여자의 머릿속에 글을 쓰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 뒤로 창문이 있고 쇼파가 있는 조금은 올드한 느낌의 방이 보인다.  이게 다 였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말하고자 하는 <파리 5구의 여인>의 모든것이 일러스트 하나로 모두 설명이 되어지고 있는데, 다른 것을 떠올려볼려고 하고 있었다.  형사, 쿠타프에겐 모든 심증이 해리를 향하고 있는데, 물증이 없다. 그리고 이상하다 싶으면 뭔가 다시 나타난다.  끊임없이 해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데뷔하지 않은 작가라는 사람이 미친건 아닐까?  그가 이야기 하는 알리바이. 파리 5구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마지트 카다르.


부다페스트에서 온 사망증명서 입니다.  카다르 부인의 부검을 마쳤다는 담당의사의 소견서와 서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카다르 부인이 살아있다고요? (p.305 

 

  이제야 왜 제목이 <파리 5구의 여인>인지, 더글라스 케네디가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지기 시작한다.  죽은 여자와의 로맨스라니.  그것도 복수심에 똘똘 뭉쳐서 살인을 했던 여인, 무섭고 떨려야하는데, 그녀를 떠날 수가 없다.  이 미지의 존재가 만들어 내는 해리 주변의 상황들.  해리가 마지트에게 들려주던 이야기 뿐 아니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알고 있다. 내 모든것을 알고 있는 여인.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젠 그녀를 벗어날 수 조차 없다.  해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려서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가 고민하는 모든 것을 해결을 해주기 시작한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지트와 케네디만 알 뿐.  시작은 분명 로맨스 였는데, 어느 순간 그녀가 해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미저리>를 연상시키면서 이 남자의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분명 존재해. 당신이 존재하는 만큼 나도 존재해. 이 방, 이 순간, 이 시간, 이게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게 우리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어. 누가 뭐래도 우리는 지금 함께하고 있으니까. 해리. 당신에게는 이게 사랑이니까."(p.356) 누가 뭐라고 하는가?  그냥 귀신이면 귀신이나 사랑하지, 살아있는 사람을 귀신도 아니고 산 사람도 아니게 만들어 버렸으니, 마지트의 정신세계가 이상하긴 하다.  어쨌든, 파리를 가더라도 '파리 5구'와 "파리 6구의 살롱'은 피해야 할 것 같다.  해리에게 질린 마지트가 또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글 솜씨와 읽던 관성으로 다 읽어 버리긴 했지만, 왠지 케네디의 글 같지 않고, 약간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읽고 나서 산뜻하진 않은데, 난 지금 또 다시 케네디의 다른 글을 손에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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