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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지원은『열하일기』를 썼을까? - 박지원 vs 심환지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1
정명섭.장웅진 지음, 이일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1월
평점 :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조선은 엄청난 혼란에 직면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중국을 대국이라 믿고 성리학과 유교를 기본 이념이라고 믿어 왔던 이들에겐 그런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놈이라고 천시하던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온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고,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서 북방 여진족의 침략을 받았다.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서는 그 아들 홍타이지가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쳐들어 왔고, 이듬해 1월에는 조선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대국이라 여겼던 중국은 명나라였지, 오랑캐라 불렸던 여진족이 아니었다. 이제 조선은 야만인이라고 얕보던 여진족을 명나라 대신 섬겨야 했고, 이런 사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실학은 이런 배경하에서 발생한 학문이었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1권은 『왜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썼을까?』이다. 실학의 대표학자인 박지원과 조선 후기 문신 심환지의 법정싸움을 다루고 있는데, 우선 이들을 알아보자. 심환지는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할 때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로 실학자들의 노력은 가상하나, 그들의 주장은 대개 허무맹랑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것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통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럼 연암 박지원은 어떤인물인가? 청나라 문물의 도입을 주장한 연암은 조선의 가난과 백성들의 곤궁함을 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실학을 연구하고 「열하일기」를 쓴것도 헛된 명성이나 관직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지배층이 아루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 채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양반들의 형태를 비판하고 조정을 비웃는「허생전」같은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17세기 중반부터 새롭게 등장한 사상으로 알고 있다. 성리학의 고루함을 비판하면서 나라를 발전시키자고 중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성왕조실록』에 실학이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조선이 개국한 직후인 태종 13년, 서기 1407년 3월 23일 권근의 상소문에서 였다. 그리고 세종 대왕과 성종 임금때까지 많지는 않지만 종종 언급되었다. 본격적인 실학은 앞서 말한것처럼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인 1636년 청나라에 의해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맞보게 되면서 사대를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충격을 받은 조선의 지도층은 피해를 수습하는 것을 외변해 버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이 시기에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토지에 관련된 세금을 뜻하는 전정, 군역과 관련된 군정, 환곡과 관련된 세금을 뜻하는 환정으로 백성들의 부담은 늘어난 반면, 국가 재정은 허약해졌다.
실학은 초기엔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개혁 방안을 주장하는데, 이는 중농학파, 경세치용 학파라고 불리며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 유형원 등이 있었고, 후기엔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해서 상업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학파, 이용후생 학파로 나뉘어지는데, 박지원, 박제가등이 이에 속한다. 농업 국가였던 조선은 당연히 토지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지만, 초기 학자들의 주장은 유교적 이상국가론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이든다. 제대로 물건이 유통이 되지 않아서 산간에 사는 사람들이 생선을 보고 놀라는 것처럼 물건의 유통이 없으니 소비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소비가 없으니 상업이 쇠퇴되었지만, 그렇다고 상업을 부흥시키자고 주장했던 후기학자들이 스스로 상업을 했던 사람도 없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양반이 상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실학이라고 통칭되는 학문들은 시대와 학자에 따라 앞에서 다룬것처럼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실학은 어찌보면 성리학에 대한 도전이나 대립이 아니라 계승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실학자들 모두 선비들이자 성리학을 배운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실학자들의 주장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하고, 낯설고, 엉뚱했을 것이다. 실제로 폭넓은 공감을 얻거나 정책으로 책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높이 기리고 있다. 특이하고 후대 사람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실학자들이 우리 스스로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자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학자들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주의를 이야기하고 타국에 뒤처지지 않았다면서 실학을 언급한다면 틀린 이야기일것이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그 시기에 나름대로 노력한 증거가 실학이라는 학문이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 다음에 들어오는 외세의 문물과 사상은 아무런 비판과 검증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런것들은 그것이 옳고 그른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실학은 우리 스스로 할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실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것, 그것이 주었던 희망때문일 것이다. 실학은 근대성을 지닌 자랑거리나 우리가 서구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새로운 학문이라는 것에 진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실학과 실학자들이 지닌 가치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