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노비가 있었을까? - 억울해 VS 나양반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0
손경희 지음, 이주한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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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작에 읽고 싶은 내용이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조선은 519년이나 유지되었는데, 어떤 사회나 조직이 500년 이상 유지된다는 것은 그만큼 장점이 많다는 뜻일것이다.  조선의 가장 큰 장점은 기록 문화라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통할정도로 모두들 알고 있다. 조선 사회를 경영했던 핵심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고, 왕조 뿐 아니라 양반들은 다섯 살 무렵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읽고 쓰면서 기록을 했다.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양천제로, 모든 백성을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는데, 양인은 양반, 중인, 평민으로 구분하고 천인은 노비, 광대, 백정, 기생, 사당, 악공, 무격등으로 나뉘었다. 천인인 노비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으로 취급되어 매매.증여.상속이 가능하는 것에서 한국사법정 40번의 재판은 시작된다.

 

 

  원고인 억울해는 나양반의 노비였던 인물로 신분을 떠나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반들은 경제 활동은 하지 않고, 먹고 놀면서 큰소리만 친다고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권리와 의무를 같이 져야 하는데, 누구든지 권리가 많으면 의무도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해는 양반은 권리만 행하고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피고인 나양반은 어떨까?  양반은 사회 지도층으로서 그에 걸맞은 도덕적 책무를 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양반들이 조선을 이끌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간 유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사법정 40화의 원고측 변호사는 김딴지, 피고측 변호사는 이대로 변호사가 맡았다. 이제 그들이 펼치는 공방전은 첫째날부터 셋째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첫째 날 - 억울해는 어떻게 노비가 됐을까?  1.양반과 노비는 어떻게 다를까?  2.억울해는 왜 노비가 됐을까?  3.노비의 생활은 어땠을까?  /  둘째 날 -  양반은 왜 과거 시험에 몰두했을까?  1.노비는 왜 글을 몰랐을까?  2.과거 시험에는 누가 응시했을까?  3.양반은 왜 관료가 되려고 했을까?  /  셋째 날 - 족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1. 족보는 단순한 집안의 기록인가?  2. 호적에는 누가 실렸나? 로 재판이 이어지면서 억울해와 나양반의 공방을 통해 조선의 가장 큰 특징인 신분제에 해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반은 원래 동반과 서반을 합쳐 부르던 말로, 글공부를 하여 관료가 된 문반과 무술을 익혀 관료가된 무반을 합쳐서 이야기 한다.  문반은 동반, 무반은 서반이라고 불렀는데, 조회를 할 적에 왕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문반이, 서쪽에는 무반이 자리한데서 따른 것이다. 처음엔 관료에 한정되었지만,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신분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비제도는 기원전 2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부분 전쟁포로를 이야기하던 것이 통일 신라이후 정복 전쟁이 사라지면서 신분을 세습시키는 노비세전번이 생겼다.  특히, 조선의 노비는 노비세전법과 함께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가혹했다고 할 수 있다.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고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노비들은 주로 솔거노비이다.

 

  조선 초기 이후 중앙에서 벗어나 지방으로 이주한 양반들이 만든 '노비 동령'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지방 양반들이 노비 통제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양반들은 노비를 무조건 몽둥이로 때려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다. 노비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에계 무례하고 불손한 노비, 남을 상하게 한 노비, 행패 부리는 노비, 밭 위로 모래를 흘려 보내는 노비에게는 몽둥이 50대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조선 후기엔 점점 노비의 수가 많아지자, 노비층 자체에서도 우열의 차이가 생겨, 공노비는 노비이면서 노비를 소유하기도 했고, 16세기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돈을 바치는 노비에겐 면천을 해 주었고, 임진 왜란 이후에는 군량 문제의 해결이나 군공에 대한 대가로 면천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면천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해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관료가 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노비들도 글을 알아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인식했으나 현실적으로 그들이 공부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유교 사회는 조상의 생명이 후손의 몸을 통해 대대로 이어진다고 믿었으며, 자식을 낳아야 제사를 지낼수 있기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애를 쓴 사회다. 양반가의 아들은 과거를 위해 다섯살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25년 가까이 공부해야 합격이 가능했었다. 양반은 과거를 통과해야만 집안의 체면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생겼지만, 소과에 합격한 생원. 진사들이 들어갈수 있는 성균관 정원은 200명에 불과했다.  이럴지니, 평균 25년에서 30년을 글 공부만 한 양반 자제들에 비해서 여건이 되지않는 노비에게 글공부는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해졌으니 당시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현실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탐구하려는 실학이 등장하였고, 농업중심의 개혁론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인 이익과 정약욕,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실을 주장한 박지원, 박제가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사법정 40화에선 노비와 양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비단 이 문제는 조선시대의 모습만은 아닐것이다.  신분제가 없어진 지 벌써 100년이 지났지만 요즘에도 학력과 재력 등을 기준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입에선 아직도 양반이니, 노비니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사회적 약자가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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