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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야만인에게 무슨일이 있었나 라고 의문을 품고 있는데, '흰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우리에게 '흰둥이'는 서양인이다. 서양인이 쓴 글 속에 '흰둥이 야만인'이라는 표현이 달려 있으니 이게 어떤 의미일까? 나뭇잎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흰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다. '2012 공쿠르상 수상작'이라는 글귀가 들어오고,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의 눈부신 고찰이라고 쓰여진 띠지가 눈길을 사로잡니다. 장지오노상, 아메리고 베스푸치 상 등 8개 문학상을 석권했단다.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책들은 눈이 가긴 하지만, 썩 내켜서 읽지는 않는 편인데, '현대판 로빈슨 크로소'라고 하니 궁금했다. 요즘 작은 아이가 읽고있는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가 '로빈슨 크로소'의 현대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이 책은 어떤 살아남기 방법을 알려주나 하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르시스 펠티에! 생폴 스쿠너 선 선원이다!"
드라마를 보면 전쟁중에 어린 동생과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아이의 이름과 부모, 형제의 이름을 잊지 말라고 매일 외워야한다고 하는 부분들이 꽤나 많이 나온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던지, 현재가 배경이 되던지 자신을 아는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쓰고 외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려고 애를 쓴다. 여기 현대판 '로빈슨 크로소'라 불리는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름을 쓸수도 말할수도 없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아주 어린 아이도 아닌 열 여덟의 표류를 당한 이 남자는 어째서 '흰둥이 야만인'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라의 시드니에 출현하게 되어진것일까? 프랑스어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전혀 유럽인 같지 않은 이 남자가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픽션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스 크로소』를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 내게 나르시스의 이야기와 발롬브룅가 학회장앞으로 보내는 서한이 교차하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버린다. 17년전 사라져버린 나르시스의 출현이 유럽사회에 미친 파장을 발롬브룅은 서한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고, 나르시스는 17년 전 시점으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다. 생폴 스쿠너 선에서 식수를 찾기위해 하선한 나르시느는 다시 배로 상선하지 못하고 홀로 떨어진다. 자신을 찾기 위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배는 돌아오지 않고, 그는 낯선 야만인들 틈에서 살아 남기 위해 그들의 삶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로빈슨'처럼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말도 의식주 생활도 어느것 하나 통하는 것이 없는 곳에서 군중속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18세 소년은 어른도 청소년도 아닌 이방인의 모습으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만났는지는 알수 없으니 그가 야만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중의 노파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여인들과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살기위해 남은 음식을 먹고 마시고 그들을 따라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살고 있는 곳만이 문명이라 생각했던 소년이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과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 소년에게 새로운 문화는 감당하기 힘든 모습으로 다가온다. 옥타브 드 발롬브룅에게 나르시스는 새로운 인류였을 것이다. 지리학자인 이 남자는 나르시스를 통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생활관을 알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었다. 어린시절 사라졌다 해도 18년 동안은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분명 그를 통해 미지의 사람들의 문화를 알아낼 수 있다 여겼는데, 생각처럼 쉽게 그가 다시 문명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태어나서 경험했던 모든 문명이 17년동안 모두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문화를 익힌 사내. 그사내의 모습에서 18년간의 유럽 문화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남자는 야만의 세계에서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와야 만 하는데 이게 가능한 것일까? '뭐야?' 혼자서 살아가는 길을 꾸며나가는 '로빈슨 크로소'보다 재미없어 하고 있다면 이 남자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1857년에 14세의 나이로 견습선원된 나르시스가 배가 난파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 가족에게 발견되어 '암글로'라는 이름으로 17년 동안 아보리진 젊음이로서 살았던 이야기가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일이 있었나』의 실제 이야기란다. 이렇게 되면 '로빈슨 크로소'나 '십오소년 표류기'는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고 하던가? 누가 현실에서 나르시스와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전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로 살았던 한 젊은이와 그를 통해 '문화인류학'의 한 획을 그르려는 시도는 아닐지라도 '야만인'이라 불렸던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었던 지리학자. 문명으로 돌아온 나르시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왕의 명으로 '고래등대' 3등급 창고 관리자가 되지만 그에게 이런 직책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타인과 함께 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살기를 원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자신이 살고 있던 곳, 야만이라 문명인들이 이름붙여놓은 그곳에서 다시 문명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누가 그것을 원했던가? 누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가? 책 소개글에는 나르시스와 옥타브 사이의 교류가 깊어질수록 나르시스는 문명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 옥타브는 그간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문명/야만’, ‘이성/광기’, ‘진보/퇴행’ 등의 대립항이 산산이 부서져 나감을 깨닫는다라고 되어있다.
허구속에서 바라보았던 '로빈슨'의 모습 속에서 나는 파라다이스를 꿈꾸어왔는지도 모른다. 집을 짓고 물고기와 과일을 채집하며 살다가 농경사회의 발달처럼 씨를 뿌리고 동물을 잡아 길을 들이기도 하고 야만인을 친구와 하인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대우하다 다시 문명으로 넘어온 남자. 저렇게 하면 살만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현실은 픽션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희망처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용하던 언어를 야만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자신의 언어를 잊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르시스는 희망을 품지만 그 희망은 희망을 꿈꾸지 않을때, 이제 희망이 아닐때 나타나면서 또 다른 문화와 충동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삶이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어느 특정 문화라면 더욱이 그럴 것이다.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삶이 아닌 인디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의 혼돈과 파괴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만은 아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