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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p.51)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 세상인가를 고민하게 만들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만에 장편소설을 가지고 나타났다. 일본에서 50만 부라는 파격적인 초판 부수로 화재를 일으키더니, 출간 이후 7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는 등 서점가에 난리가 났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외치게 만들면서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다시쓰고 있는 그의 새로운 작품은 제목이 어찌나 긴지 읽기 조차 힘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다. 역시나 그의 전작들 처럼 주요 테마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제목의 반을 차지하는 '순례를 떠난 해'는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 '순례의 해'를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물론, 책을 통해서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인지 알았고, 작품 속 쓰쿠루가 즐겨듣는 음악은 라자르 베르만 버젼이라는 것도 알았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순례의 해'를 '첫 번째 해-스위스'편부터 듣기 시작해서 '세 번째 해'까지 넘어가면 책과 함께 만나는 느낌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배경으로 인파가 밀려드는 도쿄의 역에서 과거가 살아 숨 쉬는 나고야, 핀란드의 호반 도시 헤멘린나를 거쳐 다시 도쿄에 이르기까지, 망각된 시간과 장소를 찾아 다자키 쓰쿠루는 운명적인 여행을 떠난다. 다자키 쓰쿠루는 한때 흐트러짐 없이 친밀하고 완벽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다섯 명은 나고야 시 교외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 남자가 셋, 여자가 둘. 1학년 여름에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친해져서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뀐 후에도 변함없이 한 그룹으로 뭉쳤다.' (p.11)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색채 풍성한 네 명의 친구들 곁은 다자키 쓰쿠루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곳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가면서 나고야를 떠나 도쿄로 올라온 쓰쿠루는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친구들로부터 제대로 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한다. 그 다음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자키 쓰쿠루는 죽음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친구 하나 없는 도쿄에서 혼자서 죽음에 가까운 절망을 느끼고, ‘돌아갈 장소’가 없는 절대적인 고독을 겪고 그 고통을 견뎌 낸 후 쓰쿠루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친구들에게 입은 단절의 상처로 남에게 마음을 순수하게 터놓지 않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른여섯 살이 된 쓰쿠루는 도쿄의 철도 회사에서 일을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런 그에게 16년 전 입은 상처는 여전히 속으로 피를 흘리며 그를 괴롭혔다. 쓰쿠루는 여자 친구 기모토 사라에게 ‘네 명의 완벽한 공동체’와 그곳에서 소외당한 경험을 이야기했다가 마음에 걸려 소화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풀기 위해서라도 다시 그 친구들을 찾아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당신 머리에 또는 가슴에, 아니면 그 양쪽 모두에 아직도 그때 상처가 남아 있어. 아마도 꽤 선명하게. 그런데도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15년, 16년이 지나도록 그 이유를 밝히려 하지 않았어.' (p.51) 사라의 말대로 그간 잊고 지내 온 것들을 되찾기 위하여 인파가 붐비는 도쿄 역에서 쓰쿠루는 순례의 여정을 시작한다.
프란츠 리스트가 평생에 걸쳐 작곡한 거대한 작품 '순례의 해'는 크게 세 개의 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권에는 '첫 번째 해-스위스', '두번째 해 - 이탈리아', '세 번째 해'와 같은 부제가 붙어있고, 각각의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상과 풍경, 해당 지역의 특정 장소들에서 얻은 예술적 감흥이 음악으로 표현되어있단다. 1권이 리스트의 나이 44세이던 1855년에 나왔고 마지막 3권이 그가 사망하기 전인 1883년에 나왔으니 이 작품이 그의 인생의 궤적과 함께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의 제목과는 정반대로,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는 큰 규모의 작품답게 다양하고 풍성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으며 리스트 피아노 음악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있단다. 음악의 문외한이니 색채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리 기복이 없는 잔잔한 음악이 쓰쿠루에겐 그리도 다이나믹하게 들렸다니, 듣는 이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일것이다.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예요.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 1년,스위스에 들어 있죠. Le Mal du Pays. 프랑스어예요.'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예요'(p.78) 하이다를 통해서 다시 만난 '순례의 해'는 쓰쿠루 인생에 배경음악이 되어버린다.
정각형을 이루고 있던 모임에서 자신만 색채가 없다고 생각했던 스쿠루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면서 도쿄에서 만난 하이다가 들려준 이야기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보여.'(p.108)를 떠올리게 된다. 미스터 레드, 미스터 블루, 미스 화이트, 미스 블랙으로 대변되었던 친구들과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쓰쿠루에게 친구들은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해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룹 안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난 천하태평 스포츠맨이고 아카는 두뇌 명석한 인텔리, 시로는 가련한 처녀, 구로는 기지 넘치는 코미디언, 그리고 넌 집안 좋은 도련님.' (p.202)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떠나는 순례의 여정을 통해 쓰쿠루는 개인 간의 거리, 과거와 현재의 관계,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6년의 시간은 '시루가 왜 그랬을까? 왜 나에게 그래야만 했을까?'하는 분노보다는 이해의 마음으로 보듬어 줄 수 있을 만큼 흐른 시간이었다. 자신의 내면의 피 흘리는 상처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안아주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상처난 곳에 새살이 돋아나고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아니 그 16년이 아닌, 순례를 마친 지금부터 쓰쿠루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p.364).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것이지만 그것을 들춰 내는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은폐하고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은 돌아봐야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도 말이다. 순례를 마친 색채있는 다자키 쓰쿠루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