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일생을 담은 만화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만화책이 아닌 스페인에 관한 역사서를 만난 기분이 든다. 물론 우리 만화 중에도 그런 작품들은 상당히 많다. 얼마전에 읽은 강풀님의 <26년>같은 경우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었고, 허영만 화백의 <각시탈>도 일제시대의 사회상을 만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만화속에는 허구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처럼 실화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개인사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 듯 전쟁을 무서워하고 삶이 이끌어 가는 방향으로 가는것 조차 버거워 했던 한 남자의 인생. 그의 인생을 아들이 되살려낸 이야기를 만나 보자.

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1952년에 사라고사에서 태어난 문학·시나리오 작가이자 바스크 대학교 불문학과 교수이다. 1980년대부터 만화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 오면서 텍스트의 이미지화와 이미지의 텍스트화를 연구하고 있단다. 출판사에서 제공해주는 책소개글을 찾아보니 저자는 소설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단다. 그가 아버지를 그리는 데 ‘만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만화와 문학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담뿍 담은 ‘문학-만화’를 낳았고 평단은 찬사로 응답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스페인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읽혀지고 있다. 작가는 스페인 내전에 고통받은 세대의 아픔을 풀어나가고 있는데, 작가의 고뇌 끝에 선택된 만화라는 매체와 ‘융해’된 1인칭 시점의 전개를 통해, 당시 국제 정세와 스페인 내전 및 프랑코 독재 체제의 실상을 알게 해주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아버지는 2001년 5월 4일에 자살했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살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들은 어떻게 들려주려고 하고 있을까? 살아 생전에 아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했을 아버지. 그러기에 아들은 이야기 한다. '오직 나만이 아버지와 이어진 존재다. 심지어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잠재적인 유전자로 그분이 겪은 모든 일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안다. ..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나는 그분의 진실한 증언들과 내 혈관들이 흐르는 피로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p.7~8). 이렇게 저자는 자신이 아버지로 분해 1인칭 시점으로 20세기 초의 사회를 바라보면서 소소한 일반인의 삶부터 스페인 내전까지의 상황을 세밀화로 들여다 보듯이 보여주고 있다. 1910년에 태어나 2001년 까지 90년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인생을 말이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밭 갈고 땅 넓히는 일에만 골몰하는 탐욕스러운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치이면서도 늘 다른 세상을 갈구했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 와 새 삶을 시작하며 스페인에 제2공화정이 수립되던 1931년에 어릴 적부터 소망하던 운전면허증도 땄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공화정 설립과 프랑코군의 쿠데타로 혼란스러운 도시와 내전의 상흔이 깊은 시골. 어느 곳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멋진 차를 타고 마음껏 달리는 것이 꿈이 었던 안토니오는 의용군을 만나면서 어린 시절 구경만 했던 자동차를 몰 수 있는 세상, 가겠다고 마음먹은 곳으로 바로 떠날 수 있는 세상, 전선에 도착한 편지를 나눠주는 ‘평화의 배달부’로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이제 혁명에 대한 열정만으로 가득 차 있는 순수한 사람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총알이 날고 수류탄이 터지는 전장에서도, 노동은 고되고 급료는 처참한 프랑스의 시골 농장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간절히 원하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안토니오가 찾던 행복은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일 뿐이었다.

전쟁 중 '구사일생파', '납탄동맹'이로 이름 붙여진 동지들인 빈센트, 안토니오, 바실리오, 마리아노는 총알로 만든 네개의 반지를 가지면서 삶을 이야기 하지만, 전쟁은 그들을 파괴해 버린다. 전쟁이 끝난 후에 사회는 전쟁에 중심에 있었을 때보다 더 전쟁터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파블로형을 따라 다니면서 의식주는 해결이 되지만 형이 판매를 하는 석탄이 어디서 오는지, 형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돈을 착취하는 지를 알게되면서 안토니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뿐인가? 비스킷 공장은 전쟁터의 작은 축소판이었다. 살기 위해서 서로 속이고 속이는 전쟁의 축소판. 이제 안토니오도 '납탄동맹'의 반지를 낄 자격이 사라진것만 같았다. 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약자를 돌봐야 할테니까 말이다. 어린시절부터 청장년 시절을 거쳐 노년기까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이렇게 한 사람의 자서전적 성격을 띄고 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세밀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로그로뇨 근처의 양로원으로 들어간 안토니오. 그곳에서에 생활과 안토니오의 가슴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두더지. 이 노쇠한 아흔의 노인이 어떻게 창을 통해 뛰어내렸는지 작가는 보여주지만, 분명 양로원에 부주의도 함께 하고 있다. 안토니오가 죽은 후 자살과는 별개로 양로원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끝나는 3년이 지나자 마자 월 시설 이용료(아버지가 1일이 아닌 4일에 자살을 택했기 때문에 발생한)에 대한 연체금과 이자를 요구 했단다. 힘없는 자는 당할 수 밖에 없을까? 이제 저자는 그의 무능함을 실감하면서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하고 있다. 세상을 고발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한 양로원을 고발하고 있다. 묵직하다. 게다가 이글은 무섭다. 전쟁의 장면들이 무서운것이 아니라, 세상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는 랩핑이 되어 있어서 뭘까 했는데, 역시나 아이들이 읽기엔 야한 장면들이 꽤나 많이 나온다. 바르셀로나 살롱 델 코믹 3관왕, 카탈루냐 만화대상, 각종 비평가상 수상등 2010년 스페인 최고의 만화로 불리는 이글은 그런 상들이 뭔지는 몰라도 받을 만한 작품이다. 만화책 한권으로 역사의 묵직함을 느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