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시고 쓰고 짜다 인생의 맛이 그런거지. 아, 사랑하는 나의 당신 달고 시고 쓰고 짜다. 달고 시고쓰고 짜다 나는야 노래하는 사람 당신의 깊이를 잴 수 없네 햇빛처럼. 영원처럼"
읽는 내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아버지 생각에 알싸하고 눈물 찔끔거렸는데, 이걸 글로 쓰려하니 막막하다. 어떤 아버지 이야기를 써야 하는 걸까? 누구나 가슴속에 시인을 품고 있어 홀연히 사라져 버린 유령같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야 할까? 아니면 자식에게 모든걸 바치고 염부 1, 염부 2, 염부 3으로 세상어디에나 흩뿌려진 소금처럼 살아가던 그림자같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야 할까? 내가 읽은 것은 어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아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긴 한걸까? 재미있었다. 역시 박범신이라는 찬사가 흘러나왔다. 한장 한장 넘어갈때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눈보다 손이 더 빨리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읽으면서는 그럴수도 있지 했는데, 무엇때문에 이토록 가슴이 알싸하고 먹먹해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p.9)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햇빛 살인. 찬란한 햇빛 속에서 소금 작업을 하던 염부는 몸 속에 소금이 부족해서 죽었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했다. 그냥 그랬다는 것이다. 염부의 죽음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프롤로그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이야기다. 처음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프롤로그였다. 다른 이야기에 빠져들기 전에 머리속을 흔들어 놓기 위한 작가에 의도였을까? 처음은 그랬다. 책장이 빠른 속도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강의를 하는 나는 배롱나무가 있는 폐교에서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시우를 만난다. 눈 내리던 스무 살 생일날 사라져 버린 시우의 아버지. 강경에서 젓갈장사를 하는 친구 덥석부리와 함께 주말마다 노래를 하는 옥녀봉 꼭대기 소금집의 청동조각 김을 만나면서 나는 그에 특이한 이력에 끌리기 시작한다.
전신 마비 남자와 다리를 저는 함열댁, 척추 장애인인 큰딸 신애, 실명하는 선천적인 병에 걸린 둘째딸 지애와 함께 살고 있는 청동조각 김은 한대수의 노래를 멋드러지게 부를 줄 아는 사내였다. 그와 만나면서 조금은 특이해 보이는 청동조각 김의 특별한 가족들과 만나게 된 사건을 알게 되고, 사내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청동조각 김은 염전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드리려고 150리나 되는 긴 길을 걸어갔지만, 자신이 염전 일을 도우려고 대파를 잡은 것을 본 순간, 아버지는 그를 바로 돌려보내고, 그는 다시 먼 길을 걸어오다가 쓰러진 이야기, 그곳에서 만난 세희누나 이야기. 글을 쓰는 나에게 청동조각 김, 김승민의 이야기는 신선한 글감으로 다가오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시우의 사라진 아버지 선명우를 떠오르게 만든다.
청동조각 김을 빼면 정상적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서로 닮은 구석도 없어 보였다. 조건이 그렇다면 그 집엔 비극적인 어둠이 가득 들어차 있어야 옳을 터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집안은 아주 정갈하고 환한 느낌을 주었다. (p.117)
묘한 구성이었다. 혈연으로 묶여진 가족도 아니면서, 가족보다 더 애닮픈 관계의 구성이었다. 핏줄의 끌림보다 강한 무엇이 있었다. 선명우라는 이름이 아닌 청동조각 김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서 잊혀진 가족에 이야기는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첫사랑이 아닌 뱃속에 아이로 인해 혜란과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그림자처럼 살던 남자. 선명우는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그에겐 그보다 더한 그림자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 자식을 위해 염전일을 보던 아버지. 자식의 손에 대파가 잡히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던 아버지. 주인의 뜻데로 움직일수도 없었던 그림자 같은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았건만 그것이 마지막인지 몰랐었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쏟아지는 소금자루는 아버지, 선기철을 또 다른 아버지, 선명우에게 각인시켜 버렸다. 그의 피를 타고 흐르는 아버지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딸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태어날때 부터 엄마인줄 알았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아버지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자식을 위에선 강하기만 한, 모든 위험을 막아줄 수 있는 그런 존재여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선 굶을 수도 있고, 자식을 위해선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를 그리던 아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은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고 그 사랑에 가슴이 아팠다. 아들은 자식이 아닌 사랑에 모든걸 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꿈일 뿐이었다. 자식이 태어나니 아들도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 되고 싶어서 시인에게 이야기 했는지도 모른다 "되돌아가는 길은 나, 잊었네. 너무 먼 길을 왔어. 핏줄이라고? 아닐세. 내 가족은 옥녀봉에 있어. 내게 다른 가족이 있었다면 아마, 전생의 일이었겠지.!"(p.209) 라고 아들은 시인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들은 아버지이기를 포기했는데 아버지를 찾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할까?
소금의 맛이 이렇게도 많았던가? 짠맛, 신맛, 단맛, 쓴맛을 넘어서 통감을 이야기하는 매운맛까지 작가는 이야기한다. 물론 소금에서 매운맛을 찾을수는 없다. 알고 있으면서도 빨대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매운맛이,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빨대'가 되어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통감이 찌릿하게 다가온다. 자식이 없기에, 아니 전생에 일이라 치부해 버렸기에 잉여 재산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을 것이고, 그러기에 선명우는 토판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그대로의 갯벌에 황토를 섞어 다진 바닥에서 생산된 토판염. 이런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일. 아버지가 하셨던 일을 하고 있는 아들. 그는 아버지였을까, 아들이었을까? 아니 그냥 사람이었을까? '치사해'를 외치며 부둣가에서 일하는 아버지, 베트남전에서 다리가 잘린 채 절름절름 걸어오는 아버지, 모래바람 속에서 일하는 아버지. 소금을 안고 엎어지던 아버지. 그저 염부 1, 2, 3 처럼 아버지 1, 2, 3 이 되어 살아가는 아버지.
분명 아리고 먹먹했다. 선명우 때문에...? 아니다. 그의 아버지 때문에 아리고 먹먹했다. 그의 부재로 너무나 힘들게 살수 밖에 없었던 스무살의 시우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이기전에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의 존재를 존엄하게 여기려는 선명우를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나는 그를 탓한다. 그의 어린 자녀들때문에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니까... 아니, 부모니까. 어찌되었건 부모니까. 선명우가 아이들을 원해서 낳은게 아닌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를 미리 알고 태어난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들의 이야기에 아버지이기를 거부한 사람에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아이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기에 선명우에게 등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내 사랑보다 내 삶보다 아이들이 우선시 되는 나는 엄마 1, 2, 3 이 아니라 내 아이의 엄마이고 부모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