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정 왕후는 수렴청정을 했을까? - 임꺽정 vs 문정 왕후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32
임혜련 지음, 박준우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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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몰래 가져가 미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문정왕후 어보가 60여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반가운 뉴스가 들린다.  어보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 때 사용하던,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말하는데, 중종의 둘째 비인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이다.  어보 소식으로 들썩여서 문정왕후에 급 관심이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문정왕후는 <여인천하>라는 드라마 속 주요 인물로 기억된다.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이 주인공이 었던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중심에 가장 큰 권력은 문정왕후였다.  얼마전에도 문정왕후에 관한 드라마가 있었던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만큼 문정왕후는 이야기 거리가 많은 인물이다.  조선 역사에서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니 그럴만도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와 그 시대를 함께 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여러시각으로 그려져왔다.

 

 

  나이 어린 왕 뒤에 발을 치고 앉은 대왕대비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이다.  역사 속 '수렴청정'에 대해서 여자가 나라를 다스려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견해들도 많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역사관에 남성 중심의 사관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렴청정'은 왕조 국가를 지속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어린 왕을 성인이 될때까지 옆에서 도와주고 이를 통해 왕은 훌륭한 군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수렴청정'의 본 목적이었다. '수렴청정'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왕을 도와서 정치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했고, 제대로만 시행된다면 왕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걱정 없이 운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어떤 제도이든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지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어떠했을까?

 

  병든 어머니가 잣죽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실업자인 아들이 돈 몇천 원이 없어 잣을 훔쳤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법에서는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게 된 사람도 벌을 받아야한다.  하지만 이 도둑질이 효심때문이란다.  과거 역사속에서는 권력을 가진자의 말이 법으로 통할때도 있어서 효를 우위로 볼때는 죄를 탕감해주고 상을 내리기도 했었다.  이번 법정의 원고 임꺽정은 조선 중기 명종때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인 백정이었던 인물이 곡식과 재물을 훔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면서 의적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는데, 그가 그럴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형과 왕의 친척들이 권력을 쥐고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의적일까 아니면 왕조의 기강을 흔든 역적이었을까?

  

  원고를 알아보았으니 피고인 문정왕후를(1501년~1565년) 만나보자.  조선의 제 13대 왕인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12)에 왕비가 되었고, 1545년 35세에 낳은 아들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은 1545년 부터 1553년까지 였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왕비였다.  물론 가장 힘있는 악녀라고도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조선의 왕비는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를 낳은 일, 내명부를 관리하고 감독을 하는 것이 임무였고, 마지막으로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왕비가 왕과 함께 정치를 하는 것으로 조선의 왕비 중에서 수렴청정을 시행했던 사람으로는 정희 왕후, 문정왕후, 인순 왕후, 순원 왕후 등이 있었고, 여성이면서 왕권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실제 정국을 주도했다고 할수 있다.

 

 

 

 

 

 

 

 

 

 

 

 

 

 

 

 

 

 

 

 

 

 

 

  조선 시대는 신분제도가 분명했는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은 어머니가 관비였음에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력을 바탕으로 첩에서 정실부인이 되었고, 정난정의 자녀들이 다른 집 적자와 결혼도 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서얼허통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내수사는 국가 재정이 부족해지자 갈대밭을 쓸모없는 땅이라는 이유로 빼앗아 그 땅에 있는 갈대를 백성에게 팔기도 했다.  천민이나 양인들은 갈대를 꺾어다가 빗자루, 삿갓, 그릇등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공짜로 얻었던 갈대를 돈을 주고 사서 생필품을 만들어 팔게 되니 먹고살 길이 더욱 막막해지기도 했다. 내수사에서는 갈대밭을 빼앗아서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백성들을 상대로 갈대 장사를 한것이다. 이 뿐아니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기간에는 을사사화와 같은 사화와 함께 배고품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많았다.  

 

 

  수렴첨정은 제도이면서 정치를 운영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비록 제도적인 면에서는 합법적이었다 해도 정치를 운영하는 방법에서 불법이 자행되었기 때문에 결국 피고의 수렴청정은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문정왕후는 철렴 이후에도 정치 권력을 행사했고,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일어난 온갖 부정부패, 그로 인한 백성의 깊은 고통이 치유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시눙만 했다.  권력을 맛본 자들은 그 자리를 지키려는 속성이 있다.  권력을 맛본 자들에게 그 권력의 달콤함은 치명적인 독이 되기도 했는데, 문정왕후의 경우에는 명종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가능성이 있던 왕을 무능한 왕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되게끔 만들었다.  정당했다는 이유로 묵음할 수 만은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한 백성의 피해때문이다.  권력을 악용해 그것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위협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면 그것이 어떤것이든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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