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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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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어떤때엔 '타과'로 읽고, 어떤때엔 '타파'로 읽다가 '파타'로 읽기도 하고 내멋데로 읽으면서 이게 뭘까하면서 의아했다. 이젠 파과(破果)가 아닌 청춘기를 의미하는 파과(破瓜) 마저도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내 어휘력이 이정도로 딸렸구나. 작가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p.336). 작가의 자폭이 아니라 내가 자폭할 일이다. 간신히 하나 알아들었더니 이젠 오이瓜까지 이해를 하라고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에 대한 시선의 발아는.'(p.334)
<위저드 베이커리>, <피그말리온 아이들>, <아가미>. 그 어떤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구병모'라고 커버에서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우타노 쇼고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속 '세쓰코'가 떠올랐다. 물록 <파과>속 주인공이 훨씬 강인하고, '세쓰코'보다는 헐리우드의 액션영화 속 여배우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말이다. 노부인이 사라지고 사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하철에서 무릎에 성경을 펼쳐놓고 루페를 그 위에 올려 글을 읽는 노부인의 모습은 이질적이거나 신선한 광경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60대 노부인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 한때는 '손톱'으로 불렸던 여인, ‘조각(爪角)’.
수많은 표적을 40년 동안 단숨에 처리하며 어느덧 업계에선 대모님으로 불릴정도의 위치에 있지만, 그녀의 이런 삶은 열다섯 살에 더부살이하던 당숙의 집에서 쫓기듯 나와 ‘류’를 만나게 된 이후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던 류. 어린 조각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외국인병사의 목을 꼬챙이로 정확하게 관통시키는 것을 본 류는 조각을 거두고, 자신을 거두어 방역업자로 키운 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조각은, 류가 가족이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그녀에게 더 이상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라는 다짐을 내놓은 후, 그와 함께 철저히 지킬 것 없는 ‘혼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온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삶의 희로애락에 무감각했으며, 여성으로서의 행복 역시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렇게 철저한 단절과 고독으로 유지되던 황량한 삶에 변화가 다가온다.
생각과 다른 신체적 노화로 은퇴의 시기를 고민하던 조각은 자신의 방역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되고, 방역업자들이 찾는 내과에서 자신의 비밀을 덮어준 강 박사와 그의 가족에게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라'하였건만, 몇번 본적도 없는 이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니 조각은 스스로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177)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에 손에 넘겼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연민을 타인에게서 느끼다니 조각에게 찾아온 노화는 이런것이 었을까?
조각과 함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인물. 늘 푸제아 향을 흔적처럼 풍기고 다니면서 '자기 집 할머니 대하듯' 조각에게 깐죽거리는 '투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가정부의 뒷모습을 기억하던 소년. 알약을 먹지 못하는 어린 그에게 꼼꼼하게 가루약을 챙겨주던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바로 '잊어버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면서 방역업계까지 흘러든 투우는 그렇게 '손톱'이었던 조각을 만난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줄 하나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驅除)해야 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118).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왜 투우가 강 박사를 통해 자신을 노리는지 알수 없었던 조각.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하는 것이 이유였다. 아니, 그것이 이유였을까?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p.222)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 ~ 333)
모호 했던 제목의 의미를 리뷰를 정리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작가가 흘려놓은 문장으로 다가 온 제목의 의미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독자에게 준 수수께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야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의 파릇함이 터질 것 같은 육체 위에 새겨진 파과. 작가의 말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풋풋했던 과일이 냉장고 속에서 물컹거림으로 다가오는 것보다는 파릇파릇한 청춘이 좋으니 그냥 '破瓜네요.' 하고 이야기 하려다가도 또 다시 조각이 생각나면서 '破果일까?'하고 갸우뚱 거리다가 조각의 손톱을 보면서 또 다시 '破瓜였군'하고 되네이게 만드는 이 책은 구병모의 <파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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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어떤때엔 '타과'로 읽고, 어떤때엔 '타파'로 읽다가 '파타'로 읽기도 하고 내멋데로 읽으면서 이게 뭘까하면서 의아했다. 이젠 파과(破果)가 아닌 청춘기를 의미하는 파과(破瓜) 마저도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내 어휘력이 이정도로 딸렸구나. 작가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p.336). 작가의 자폭이 아니라 내가 자폭할 일이다. 간신히 하나 알아들었더니 이젠 오이瓜까지 이해를 하라고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에 대한 시선의 발아는.'(p.334)
<위저드 베이커리>, <피그말리온 아이들>, <아가미>. 그 어떤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구병모'라고 커버에서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우타노 쇼고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속 '세쓰코'가 떠올랐다. 물록 <파과>속 주인공이 훨씬 강인하고, '세쓰코'보다는 헐리우드의 액션영화 속 여배우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말이다. 노부인이 사라지고 사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하철에서 무릎에 성경을 펼쳐놓고 루페를 그 위에 올려 글을 읽는 노부인의 모습은 이질적이거나 신선한 광경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60대 노부인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 한때는 '손톱'으로 불렸던 여인, ‘조각(爪角)’.
수많은 표적을 40년 동안 단숨에 처리하며 어느덧 업계에선 대모님으로 불릴정도의 위치에 있지만, 그녀의 이런 삶은 열다섯 살에 더부살이하던 당숙의 집에서 쫓기듯 나와 ‘류’를 만나게 된 이후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던 류. 어린 조각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외국인병사의 목을 꼬챙이로 정확하게 관통시키는 것을 본 류는 조각을 거두고, 자신을 거두어 방역업자로 키운 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조각은, 류가 가족이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그녀에게 더 이상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라는 다짐을 내놓은 후, 그와 함께 철저히 지킬 것 없는 ‘혼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온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삶의 희로애락에 무감각했으며, 여성으로서의 행복 역시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렇게 철저한 단절과 고독으로 유지되던 황량한 삶에 변화가 다가온다.
생각과 다른 신체적 노화로 은퇴의 시기를 고민하던 조각은 자신의 방역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되고, 방역업자들이 찾는 내과에서 자신의 비밀을 덮어준 강 박사와 그의 가족에게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라'하였건만, 몇번 본적도 없는 이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니 조각은 스스로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177)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에 손에 넘겼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연민을 타인에게서 느끼다니 조각에게 찾아온 노화는 이런것이 었을까?
조각과 함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인물. 늘 푸제아 향을 흔적처럼 풍기고 다니면서 '자기 집 할머니 대하듯' 조각에게 깐죽거리는 '투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가정부의 뒷모습을 기억하던 소년. 알약을 먹지 못하는 어린 그에게 꼼꼼하게 가루약을 챙겨주던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바로 '잊어버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면서 방역업계까지 흘러든 투우는 그렇게 '손톱'이었던 조각을 만난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줄 하나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驅除)해야 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118).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왜 투우가 강 박사를 통해 자신을 노리는지 알수 없었던 조각.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하는 것이 이유였다. 아니, 그것이 이유였을까?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p.222)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 ~ 333)
모호 했던 제목의 의미를 리뷰를 정리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작가가 흘려놓은 문장으로 다가 온 제목의 의미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독자에게 준 수수께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야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의 파릇함이 터질 것 같은 육체 위에 새겨진 파과. 작가의 말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풋풋했던 과일이 냉장고 속에서 물컹거림으로 다가오는 것보다는 파릇파릇한 청춘이 좋으니 그냥 '破瓜네요.' 하고 이야기 하려다가도 또 다시 조각이 생각나면서 '破果일까?'하고 갸우뚱 거리다가 조각의 손톱을 보면서 또 다시 '破瓜였군'하고 되네이게 만드는 이 책은 구병모의 <파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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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어떤때엔 '타과'로 읽고, 어떤때엔 '타파'로 읽다가 '파타'로 읽기도 하고 내멋데로 읽으면서 이게 뭘까하면서 의아했다. 이젠 파과(破果)가 아닌 청춘기를 의미하는 파과(破瓜) 마저도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내 어휘력이 이정도로 딸렸구나. 작가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p.336). 작가의 자폭이 아니라 내가 자폭할 일이다. 간신히 하나 알아들었더니 이젠 오이瓜까지 이해를 하라고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에 대한 시선의 발아는.'(p.334)
<위저드 베이커리>, <피그말리온 아이들>, <아가미>. 그 어떤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구병모'라고 커버에서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우타노 쇼고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속 '세쓰코'가 떠올랐다. 물록 <파과>속 주인공이 훨씬 강인하고, '세쓰코'보다는 헐리우드의 액션영화 속 여배우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말이다. 노부인이 사라지고 사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하철에서 무릎에 성경을 펼쳐놓고 루페를 그 위에 올려 글을 읽는 노부인의 모습은 이질적이거나 신선한 광경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60대 노부인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 한때는 '손톱'으로 불렸던 여인, ‘조각(爪角)’.
수많은 표적을 40년 동안 단숨에 처리하며 어느덧 업계에선 대모님으로 불릴정도의 위치에 있지만, 그녀의 이런 삶은 열다섯 살에 더부살이하던 당숙의 집에서 쫓기듯 나와 ‘류’를 만나게 된 이후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던 류. 어린 조각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외국인병사의 목을 꼬챙이로 정확하게 관통시키는 것을 본 류는 조각을 거두고, 자신을 거두어 방역업자로 키운 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조각은, 류가 가족이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그녀에게 더 이상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라는 다짐을 내놓은 후, 그와 함께 철저히 지킬 것 없는 ‘혼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온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삶의 희로애락에 무감각했으며, 여성으로서의 행복 역시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렇게 철저한 단절과 고독으로 유지되던 황량한 삶에 변화가 다가온다.
생각과 다른 신체적 노화로 은퇴의 시기를 고민하던 조각은 자신의 방역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되고, 방역업자들이 찾는 내과에서 자신의 비밀을 덮어준 강 박사와 그의 가족에게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라'하였건만, 몇번 본적도 없는 이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니 조각은 스스로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177)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에 손에 넘겼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연민을 타인에게서 느끼다니 조각에게 찾아온 노화는 이런것이 었을까?
조각과 함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인물. 늘 푸제아 향을 흔적처럼 풍기고 다니면서 '자기 집 할머니 대하듯' 조각에게 깐죽거리는 '투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가정부의 뒷모습을 기억하던 소년. 알약을 먹지 못하는 어린 그에게 꼼꼼하게 가루약을 챙겨주던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바로 '잊어버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면서 방역업계까지 흘러든 투우는 그렇게 '손톱'이었던 조각을 만난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줄 하나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驅除)해야 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118).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왜 투우가 강 박사를 통해 자신을 노리는지 알수 없었던 조각.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하는 것이 이유였다. 아니, 그것이 이유였을까?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p.222)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 ~ 333)
모호 했던 제목의 의미를 리뷰를 정리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작가가 흘려놓은 문장으로 다가 온 제목의 의미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독자에게 준 수수께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야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의 파릇함이 터질 것 같은 육체 위에 새겨진 파과. 작가의 말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풋풋했던 과일이 냉장고 속에서 물컹거림으로 다가오는 것보다는 파릇파릇한 청춘이 좋으니 그냥 '破瓜네요.' 하고 이야기 하려다가도 또 다시 조각이 생각나면서 '破果일까?'하고 갸우뚱 거리다가 조각의 손톱을 보면서 또 다시 '破瓜였군'하고 되네이게 만드는 이 책은 구병모의 <파과>다. |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 어떤때엔 '타과'로 읽고, 어떤때엔 '타파'로 읽다가 '파타'로 읽기도 하고 내멋데로 읽으면서 이게 뭘까하면서 의아했다. 이젠 파과(破果)가 아닌 청춘기를 의미하는 파과(破瓜) 마저도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내 어휘력이 이정도로 딸렸구나. 작가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p.336). 작가의 자폭이 아니라 내가 자폭할 일이다. 간신히 하나 알아들었더니 이젠 오이瓜까지 이해를 하라고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에 대한 시선의 발아는.'(p.334)
<위저드 베이커리>, <피그말리온 아이들>, <아가미>. 그 어떤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구병모'라고 커버에서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우타노 쇼고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속 '세쓰코'가 떠올랐다. 물록 <파과>속 주인공이 훨씬 강인하고, '세쓰코'보다는 헐리우드의 액션영화 속 여배우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말이다. 노부인이 사라지고 사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하철에서 무릎에 성경을 펼쳐놓고 루페를 그 위에 올려 글을 읽는 노부인의 모습은 이질적이거나 신선한 광경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60대 노부인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 한때는 '손톱'으로 불렸던 여인, ‘조각(爪角)’.
수많은 표적을 40년 동안 단숨에 처리하며 어느덧 업계에선 대모님으로 불릴정도의 위치에 있지만, 그녀의 이런 삶은 열다섯 살에 더부살이하던 당숙의 집에서 쫓기듯 나와 ‘류’를 만나게 된 이후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던 류. 어린 조각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외국인병사의 목을 꼬챙이로 정확하게 관통시키는 것을 본 류는 조각을 거두고, 자신을 거두어 방역업자로 키운 류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조각은, 류가 가족이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그녀에게 더 이상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라는 다짐을 내놓은 후, 그와 함께 철저히 지킬 것 없는 ‘혼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온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삶의 희로애락에 무감각했으며, 여성으로서의 행복 역시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렇게 철저한 단절과 고독으로 유지되던 황량한 삶에 변화가 다가온다.
생각과 다른 신체적 노화로 은퇴의 시기를 고민하던 조각은 자신의 방역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되고, 방역업자들이 찾는 내과에서 자신의 비밀을 덮어준 강 박사와 그의 가족에게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라'하였건만, 몇번 본적도 없는 이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니 조각은 스스로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177)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에 손에 넘겼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연민을 타인에게서 느끼다니 조각에게 찾아온 노화는 이런것이 었을까?
조각과 함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인물. 늘 푸제아 향을 흔적처럼 풍기고 다니면서 '자기 집 할머니 대하듯' 조각에게 깐죽거리는 '투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가정부의 뒷모습을 기억하던 소년. 알약을 먹지 못하는 어린 그에게 꼼꼼하게 가루약을 챙겨주던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바로 '잊어버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면서 방역업계까지 흘러든 투우는 그렇게 '손톱'이었던 조각을 만난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줄 하나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왜 누군가의 안에서 구제(驅除)해야 할 해충이나 소탕해야 할 쥐새끼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에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118).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왜 투우가 강 박사를 통해 자신을 노리는지 알수 없었던 조각.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하는 것이 이유였다. 아니, 그것이 이유였을까?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p.222)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 ~ 333)
모호 했던 제목의 의미를 리뷰를 정리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작가가 흘려놓은 문장으로 다가 온 제목의 의미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독자에게 준 수수께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야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의 파릇함이 터질 것 같은 육체 위에 새겨진 파과. 작가의 말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풋풋했던 과일이 냉장고 속에서 물컹거림으로 다가오는 것보다는 파릇파릇한 청춘이 좋으니 그냥 '破瓜네요.' 하고 이야기 하려다가도 또 다시 조각이 생각나면서 '破果일까?'하고 갸우뚱 거리다가 조각의 손톱을 보면서 또 다시 '破瓜였군'하고 되네이게 만드는 이 책은 구병모의 <파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