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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볼 수 없었을까? - 유자광 vs 김일손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9
김경수 지음, 고영미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평점 :
역사공화국을 연달아 읽었다. '연산군 vs 박원종'에 법정 싸움을 읽은 후 읽은 내용이 '유자광 vs 김일손'이 벌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이야기다. 앞에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조의제문'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었었는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들이 교집합을 이루면서도 글을 쓴 작가가 달라서 새로운 관점으로 사건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역사공화국>의 매력이다. 한 두권만 읽어도 다각면으로 하나의 사건을 보게 되니 말이다. 이번호는 조선시대에 정치가 이뤄지는 모든 자리에 참석해서 직필을 목숨처럼 여겨던 사관에 대한 이야기다.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쓰는 직필과 강한 윤리성, 비판 정신을 두루 갖춘 사관을 통해 막중한 역사적 책임이 붓 끝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들에 이야기 중 가장 굵직한 것이 김일손과 '무오사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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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사냥을 나갔다. 왕의 사냥 놀이인 만큼 고위 관료는 물론이고 궁녀와 내시까지 대규모 인원이 사냥터에 동행했다. 그런데 태종이 사냥터에 도착해서 말에서 내리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말에서 떨어진 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 사냥터에 사관이 따라 왔는가. 내가 말에서 떨어진 것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 - 태종실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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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사실은 물론, 그걸 기록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까지 낱낱이 사초에 기록했으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과 사관뿐이다'라는 태종의 고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록에는 국왕이 행한 정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무슨일을 했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거기에 사관의 역사적인 평가까지 들어 있어서 정선의 정치와 경제, 여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실록은 조선 역사를 꿰뚫어 보고, 양반 관료들의 글쓰기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 낙타나 있었는지, 안경이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도 실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번 화는 유자광대 김일손의 공방을 통해서 오늘날의 정치가들, 신문사와 기자의 역할을 생각하게 만들면서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사관은 어떻게 뽑을까? 사관은 문관에 급제한 인물로 역사를 께뚫어 보는 눈과 역사를 서술하는 능력,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판단 능려이 있어야 했으면 기본적으로 본인은 물론 친가와 처가 모두 문제가 없어야 사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사관을 뽑을 때는 가문의 이력까지 낱낱이 훑은 후 조상 중에 불법으로 재산을 모았거나 서자 출신이 있으면 임명되지 못했고, 미혼자는 결혼한 뒤 처가 쪽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뽑지 않았다. 물론 요행으로 사관으로 뽑힌 사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정직하지 않은 이는 사관이 될 수 없었다. 사관은 입시와 사초의 작성, 시정기의 작성을 주요 하게 다뤘는데, 입시란 사관이 정치가 벌어지는 모든 자리에 참석하여 관련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고, 사초는 실록의 초안으로 사관의 비평까지 들어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정기는 관청의 정치 일기로 볼 수 있는데, 사초와 달리 사관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평가가 없는 자료로 당시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열 쇠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실록'이라고 약칭하기도 하는데, <연산군일기>나 <광해군일기>도 모두 실록이다. 연산군, 광해군처럼 왕위에서 쫓겨난 왕들의 실록에는 정식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일기'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5백년 가까운 왕조의 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 기록된 사실은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다. 뿐만 나니라 세종 이후부터 금속 활자나 목활자로 된 인쇄물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실록은 한두 질에 그쳤으므로 필사본으로 만족했는데, 유독 <조선왕조실록>만 후세에 영구히 전하려는 의식 아래 네다섯 곳에 나누어 보관했기 때문에 활자 인쇄를 했다. 조선 왕조 5백년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사관들이 있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그런데 그 분들중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려고 사초를 누출한 사관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열리 정치를 지향하고 제 몫을 올곧이 해 내려는 위대한 사관들이 있었다는 증거다. 제 목숨만큼인 귀중하게 여겼던 사초, 이것을 통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탄생했다고 하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의 경우이지만 왕조의 정당성이나 당파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역사적인 사실이 왜곡되기도 했다. 조선 건국기의 사실이나, 중기 이후 당쟁이 전개되던 시기에 편찬된 것들이 그런데, 집권 당파의 잏관계에 따라 서술 내용이 달라지거나 이미 편찬된 것을 고치면서 '수정 실록', '개수 실록', '보수 실록'의 예도 있지만, 실록 편찬은 현재군주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사업이었다. 따라서 굳건한 의지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록에는 서놩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정치권의 힘 있는 인사들 모두 상세하게 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편찬에 참여해서 직필을 견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의 스승이 지은 '조의제문'을 실은 것으로 야기되어졌는데, 사관의 우두머리였던 이극돈이 자신의 비리와 '조의제문'이 실린 사초를 보고 유자광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비롯되기 시작했다.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 임금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글이라는 '조의제문'. 세조 임금을 비난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한 반역자 일당이라며 연산군은 김일손을 죽이게 되는 '무오사화'. 이번 화에서 다루는 문제는 연산군의 폭정이 아닌, 봐서는 안되는 '사초'에 글을 임금에게 보였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될 것이다. 열린 정치를 위한 길은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역사 속에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 총 1,893권 888책에 수록된 실록이 명맥을 유지한것은 임금과 사관이 함께 정도를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올곧은 가치관과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들에 글에 칼을 들이밀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