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 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했을까? - 함양박씨 vs 성종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7
정성희 지음, 황기홍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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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혼 금지법이라는 것이 있었다는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 법이 여자에게만 해당되었던것을 알고 있을까? 여성에게만 해당되었던 '재혼 금지법'은 1894년에 사라졌지만, 여성은 임신여부때문에 6개월동안 재혼을 할수 없게 되었었고, 이 법은 2005년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 규정이라고 해서 폐지되었다. 근간의 일이다.  흔히 세상의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라고 하지만 역사공화국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만나게 되는 지나 온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시기는 별로 없다.  언젠가 부터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현모양처가 최고에 대우인것처럼 말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양성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곳곳에 차별적인 문화를 발견하고 있다.  역사공화국 27화에서는 이 차별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1770년대에 살던 함양박씨가 1470년대를 살았던 성종에게 소장을 제출했단다.  역사공화국이니 가능한 일이지만 성종보다 300년이나 늦게 태어난 함양박씨가 왜 소장을 제출했을까?  우선은 함양박씨부터 알아봐야한다.  함양박씨는 경상남도 안의 출신의 열녀로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쓴 <열녀함양박씨전>에 주인공이다.  남편이 일찍 죽자 3년 상을 치른 뒤 자결을 한것을 박지원이 조정에 소를 올리기위해 함양박씨를 주인공으로 글을 썼단다.  물론 그녀는 열녀문을 받았지만, 역사공화국 소송에서는 열녀문을 반환하고자 한다.  그런데 왜 성종에게 소장을 낸 것일까?  성종은 1457년에 태어나 1469년부터 1494년까지 25년을 재위한 조선 제9대 왕으로 조선을 유교 국가의 반열에 올린 주인공이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겨지던 열녀문을 이제에 반환하겠다니, 그것도 자신보다 300년이나 앞선 임금에게 말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최초의 종합법전, 즉 조선시대의 헌법은 <경국대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관습법이나 중국 법률에만 의존하고 있다가, 1457년 세조 3년에 시작하여 1485년 성종 때 완정된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 체계로 조선의 유교식 국가 운영 체계를 완성했다.  '경국대전'에는 과부의 재가금지, 서얼 자손의 영구 과거 금지, 노비 매매의 허용등에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시대적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가 있다.  특히 재혼 금지법의 경우 성종은 논의에 참여한 신하 총 46명 중 42명이 재혼 금지법을 반대하고 불과 4명만이 찬성했음에도 소수 의견을 따라 "재혼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만들었다.  이는 남자 중심의 가계 계승 질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들이 들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권 여성들은 얼굴이나 피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르카를 머리에 써서 전신을 가리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지만, 현재에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이슬람권에 생활양식과 다른것이 있을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문화는 조선의 유교문화에 영향이 클것이다.  고려는 불교 중심의 국가였고, 조선은 유교 중심의 국가였다.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는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했지만, 불교는 혈통을 중요시했고,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 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기에 고려는 재산 상속에서도 '균분 상속'이 되었지만, 조선은 유교 풍습이 널리 퍼진 이후에는 큰아들을 위주로 상속되었고, 결혼한 딸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시집을 가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집살이가 고되고 힘들다는 말인데, 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을까?  조선시대엔 결혼한 여인에게만 적용되는 '7가지 죄', <칠거지악>이 있었다.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 2. 아들을 못 낳은 여자, 3. 행실이 음란한 여자, 4. 질투하는 여자, 5. 나쁜 질병이 있는 여자, 6. 말이 많은 여자, 7. 도벽이 있는 여자. 사람을 기준하는 잣대다.  우시장에서 소를 고르는 기준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에 생각일까?  <칠거지악>은 남자에 입장에서 '이혼'을 용이하게 하는 제도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어가는 유교 풍습은 여인들에게는 엄하기만한 굴레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남편을 잃고 재혼이 금지된 조선에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엔 혼자 사는 여성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혼자선 먹고살기 위해서 할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은 남성중심 사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열녀문>은 벼슬을 얻을 수 있는 길로 변질되면서 죽음을 강요하는 경우도 상당했다고 한다.  물론 영조의 딸인 화순 옹주처럼 사모의 마음을 남편의 뒤를 따르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조선 새대의 여자들에게 은연중 기대하고 있던 이 도덕전 찬양은 생각해 볼 문제다.  열녀문을 받으면 여자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다른 것으로는 가능할수 없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열녀문이라는 것이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저 남자들처럼 도덕적 인격체로 대우받고자 하는 열망이 수많은 여성들을 열녀의 길로 내몬것은 아니었을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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