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4.19 혁명이 일어났을까? - 장면 vs 이승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7
박은화 지음, 이남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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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근현대사는 슬쩍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아직 그 시절을 살던 분들이 살아계시는 이유도 있겠지만,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근현대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4.19 혁명도 그 중 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4.19 혁명은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국민의 손으로 마감한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첫 출발점이자 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들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 혁명의 성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4.19 혁명이 무엇인지 부터 알아보자.

 

 

 해방 후,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선거는 남북이 분단된 채 치러진 선거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는 남북한의 분단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그결과 1대 국회 의원에 친일파와 이승만 측근 세력이 대거 당선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2대 국회의원부터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국회의원이 되었고, 자신을 뽑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대통령을 뽑는 방식을 변경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한다.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선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시기에,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인은 이승만이었다.  그를 누를 수 있는 유명인으로 김구 선생님을 뽑을 수 있겠지만, 1949년에 암살당하셨으니, 이승만이 직선제 카드를 뽑은것은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이승만 정권을 이야기 하면 12년의 독재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투표로 개헌을 했을텐데 뭐가 문제였을까? 찬성 14표, 반대 143표의 완벽한 부결을 외부 세력을 동원해서 대통령 직선제 부결 민중운동을 벌이고, 백골단을 동원하고 국회의원들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는 시기에 기립 투표를 했다면 말이 달라진다. 부결된 안은 1952년 7월 4일 경찰과 폭력 조직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회에서 기립투표로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가 되었다.  그렇게 이승만은 7월 4일 헌법 개헌, 7월 26일 후보 등록, 8월 5일 투표로 10일만에 당선이 되었다.  이제 이승만이 어떻게 3대까지 대통령을 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그당시 헌법은 대통령은 두 번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선거에 나올 수 없었음에도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만나 볼 차례다. 대통령을 두 번까지만 할 수 있다는 헌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없앤다는 말도 안되는 개헌. 당시 국회의원은 총 203명이었고 2/3의 찬성이 있어야만 개헌이 통과할 수 있는데, 13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135.33이라면 136명이 찬성표를 던져야 가결이 되는것이 맞지만, 무조건 안건을 통과시키라는 이승만의 지시는 '사사오입 개헌'을 만들어 내고 만다.  헌법개헌에 반올림을 사용하고 개헌안이 통과됐다고 생떼를 쓰는 유일무이한 비상식적인 정권은 이렇게 존재를 하게 된다.  불법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진보당의 조봉암은 4대 대통령 선거의 걸림돌로 여겼었기에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해 버린다.  간첩사건에 대한 증인과 증거는 처음부터 조작된 티가 났지만, 그 시대엔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1,2,3대 대통령을 연이어 연임했지만, 그 과정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코미디같은 개헌이 수두룩했고, 이것에 만족하지 못한 이승만은 3.15 부정 선거로 유명한 4대 대통령 선거에 나가게 된다.  4대는 대통령후보로 이승만만 나왔기 때문에 대통령을 뽑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부정이 개입된 것은 장면과 이기붕의 부통령 싸움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84세 였고,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대행하는 상황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겁이 났었을 것이다.  2대부터 부통령을 했던 장면의 인지도를 이기붕이 이기기는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이제 완벽한 코미디가 시작된다.  선거 시작전부터 이승만, 이기붕이 찍힌 투표용지가 투표함에 들어있는 사전투표, 삼삼오오 짝지어 투표소에 들어가는 비밀투표 원칙 무시와 투표함 바꿔치기 까지.  얼마나 많이 부정을 했는지,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오게 된다. 

 

 

 3.15 부정 선거는 이렇게 4.19 혁명의 원인이 된다. 1960년 3월 15일에 발생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 시위는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마산시위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김주열군(당시 17세)의 시신이 한달뒤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진상규명및 정권퇴진을 요구하게 된다.  3.15 부정 선거에 반발한 시민들의 불만은 커지고,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민주화 요구는 짓밟을 수가 없었다. 이 요구가 터져 버린게 4.19 혁명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4.19혁명 당일 거리온 나온 시민들 중 183명이 죽고 6,259명이 부상을 당했다. 자신의 목숨과 안전에 위협이 가해지는 걸 뻡히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 사람들.  분단의 위기를 말하면서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겠다고 외쳤던 그들의 실상을 국민들이 알아 버린것이다. 

 

 4.19 혁명의 결과는 이승만의 하야와 이기붕 가족의 자살로 일단락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원내각제를 했던 제 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5.16군사 정변으로 막을 내리고, 5.16군사 정변을 통해 1963년 제 3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본을 받는 것 처럼 대한 민국 정치는 이승만 정권 뒤에 박정희 독재, 전두환 군사 정부까지 이어졌고, 불법적 정치 형태 역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다.  제 3공화국의 이야기가 역사공화국을 통해서 나올지는 모르겠다.  이승만 정권 당시는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승만이 집권했던 12년동안 국민들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이승만과 자유당만 이익을 보는 정치가 지행되었다. 이는 분명 옳은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몇백년 앞서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들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어찌보면 민주주의는 유기체일지도 모른다. 약한듯 강하면서도 애민하기까지 해서 노력을 게을리 하는 순간 금세 사라지거나 쇠퇴하고, 항상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 말이다.  민주주의의 첫 출발점이라는 4.19혁명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나를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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