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여성은 구여성과 다른 삶을 살았을까? - 구효부 vs 신문물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5
손경희 지음, 조환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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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서 원시 사회부터 조선 시기까지 여성들에게는 공식적인 교육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어느 시기에도 여성을 위한 학교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나마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아버지나 오빠에게 배우는 정도에 불과했다.  신식학교는 1876년 개항이 되고 난 이후 외국 선교사와 대한 제국에 의해 설립되기 시작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조선의 여성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다.  1919년까지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인 관공립. 사립 보통학교에서 공부한 조선의 여성의 숫자는 9,276명이었고, 당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6개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매우 적었고 여성의 취학률은 0.7%에 불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조선을 떠나 일본, 미국, 유럽에서 유학하여 자신의 재능을 키운 여성들이 있었고, 그들을 우리는 '신여성'이라고 부른다.

 

 

 이번 법정의 원고 구효부는 사람은 사람의 기본 예의를 지켜야하는데, 많이 배운 신여성들은 집안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사치와 허영에 빠져 있으면서 구여성인 자신들을 비난한다고, 조선의 바른 여성이라면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가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고인 신문물은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새로운 것을 배워야하며, 여성들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고 , 역사를 움직이는 바퀴 축에서 여성도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구효부가 신문물을 고소한 이유중에는 신문물이 많이 공부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남편을 빼앗았다는 것도 들어있다.  이번 사건은 1920년대 여성 교육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신여성은 몇몇 시대를 앞서 간 여성들만이 아닌, 그 당시에 교육받은 여성 전체를 가리키는데, 1923년에 창간된 여성 잡지 『신여성』에서는 "지식을 갖추고 평등 의식이 싹트는 단계이며, 구식 여성보다 의지가 월등하고 의지를 실천하는 힘이 남다른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오늘의 시대를 똑바로 보고 나 자신에 대한 의식을 넓히고, 여자라는 처지에서 또는 조선의 여자라는 처지에서 자기의 할 바가 무엇인가를, 즉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히 알고서 실행하는 여성이 신여성이다"라고 되어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조선을 위해 뭔가를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말이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발도 하고 짧은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기시작하고, 일을 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옷차림이 간편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도시문화를 즐기기 시작한다.  1930년대 경성에만 카페가 1,000개 이상이었고,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은 세련된 도시 문화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 나라의 백성 입장에서 보면 '모던걸'이라고 불리던 '신여성'들은 당시 사람들에겐 굉장히 비판적이었고, 1927년 『별건곤』에 실린 박영희의 「유산자 사회의 소위 근대녀, 근대남의 특징, 모던 걸. 모던 보이 대논평」을 통해서도 사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여성의 지위는 전반적으로 크게 열악했다.  남존여비로 표현되는 봉건적 인습 탓도 있지만, 일제가 여성 차별을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식민 세력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 피식민 집단의 저항을 극소화하려는 의도로 조선인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당시 구여성들은 규방 가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이해했는데 「시골 여자 슬픈사연」,「여자의 설움」등의 규방가사와, 상록수를 지은 심훈 작가의 장편소설인 『직녀성』을 통해서 그 당시 구여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신여성들을 보면서 구여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여성들의 삶도 바뀌게 만드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여권 선언문인 '여성 통문'이 1898년 9월 1일 발표되면서 당시 사회는 크게 놀라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피고인 신문물은 원고인 구효부의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까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사랑은 할 수 있으나 혼인은 못하는 신여성과 부인은 될 수 있으나 사랑은 못 받은 구여성.  대한민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다 유행 가수로 전향한뒤 <사의 찬미>를 발표한 윤심덕도 이러한 경우였는데,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김우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다 현해탄에 동반 자살을 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신여성들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을까?  당시의 결혼 풍습은 부모가 짝지어준 상대와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이 있는 집안에 자제들은 그렇게 결혼을 하고 일본유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신문물을 배우기위해 유학을 온 신여성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사실만 두고 본다면, 이 재판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재판이다. 하지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5호가 신여성과 구여성을 다룬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배움에서 밀려나 있던 여성들이 역사의 한축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그녀들이 공부를 시작했고, 그 힘겨움 속에서 살았을까를 보기 위함이 신여성과 구여성의 다른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삶이든 이것이 맞다, 아니다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여전히 사회는 조강지처나 전업주부를 이야기하고, 사회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에겐 큰 짐을 지게하는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 세대에 일을 하셨던 그 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조금은 더 편한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리의 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는 조금 더 편한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아이들에게 까지 미치지 않게 하기위해서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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