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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들어와! 들어와!" 그가 흐느겼다. "캐시, 들어오라니까. 아아. 제발 한 번만! 아아, 나는 너뿐인데! 이번에는 듣고 있니? 캐서린 , 지금은 들리니?" (p.48)
1847년에 발표 된 책을 2012년에 읽고 있다는 건, 이 책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뿐인가? 165년전에 발표된 책을 읽으면서 가슴 떨리고 가슴 에이고 분노까지 하고 있다. 분명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대로 된 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얼마전에 작은 아이가 만화로 된 짧은 『폭풍의 언덕』을 읽는 걸 보고, 따라 읽어봤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내침김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 문학 전집속에 있는 『폭풍의 언덕』을 꺼내들었다. 아이들 책은 왜 이리 잘라 먹은 것이 많은지, 책을 읽고나서야 빠진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영국 북부의 방언 Wuthering이 이 책의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 영국 신사 록우드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이라는 이름의 농장을 빌려 살기로 한 첫날, 록우드는 농장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폭풍의 언덕'이라는 농장을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보게된 기이한 사람들. 너무나 아름답지만 쌀쌀맞기 그지없는 히스클리프 부인, 일꾼인지 아닌지 분간 할수 없는 헤어턴 그리고 사납기가 그지없는 집시 신사, 히스클리프. 도통 관계를 알 수 없는 '폭풍의 언덕'의 사람들.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밤, 록우드가 만난 어린 유령과 흐느껴 우는 히스클리프는 이 이상한 농장, '폭풍의 언덕'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인 넬리에게서 그들의 기막힌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오래전, '폭풍의 언덕'의 주인인 언쇼씨가 집시아이 하나를 주워온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변했을 지도 모른다. 언쇼씨가 주워온 아이와 언쇼씨의 예쁜 딸, 캐서린은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다. 언쇼씨가 죽은 후 언쇼씨의 아들, 힌들리가 '폭풍의 언덕'의 새로운 주인이 되자, 히스클리프는 그집에 일꾼이 되어야만 했다. 왜 언쇼씨가 히스클리프를 그렇게 사랑했는지 알수 없지만, 자신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힌들리에게 히스클리프는 눈에 가시엿을 것이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성격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변덕스럽고 정신이 없다. 힌들리에 아내가 죽으면서 힌들리에 화는 극을 달하고 그 화는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힌들리에게 어떻게 복수해줄까 궁리하고 있어. 아무리 오래 걸린 다 해도, 반드시 복수해줄 거야. 설마 힌들리가 내가 복수하기 전에 죽어버리지는 않겠지!"(p.98) 이렇게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한 친구가 들어오고 한 친구가 나가는 그 순간, 캐서린은 두 친구의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험준한 탄광촌을 보다가 초목이 무성한 아름다운 골짜기를 보는 것과 비슷했겠지요." (p.112) 캐서린에게 새로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에드거. 히스클리프와는 너무나 다른 인물. 변덕이 죽끓듯 변하는 캐서린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p.130).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서는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에드거와 결혼을 해버리면서 히스클리프가 떠나버린다.
에드거와 행복한 것이 아니었던가? 몇해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어 버린다. 케서린에겐 히스클리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돌아온것만으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에드거의 동생 이사벨라가 사랑한단다. 자신만의 연인을 사랑하겠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에드거는 그의 사랑을 빼앗길 것만 걱정을 한단다.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의 일부라 생각했기에 이기적인 케서린에겐 아무 문제가 안되었을지도 모른다. 케서린이 자신의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순간, 히스클리프가 할 수 있는 건 당연히 복수 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의 복수의 끝에 사랑에 빠진 이사벨라가 들어왔다. 결혼한지 하루만에 사태를 파악해 버린 이사벨라. 괴물같은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된 이사벨라에게 남겨진 것은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턴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다른 이의 사람이 된걸 보면서 케서린은 정신착란과 함께 여자아이를 낳고 죽는다.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내 앞날은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로 끝나. 그 애없는 삶은 지옥이야." (p.235)라고 외쳤던 히스클리프에게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모든 사람들은 저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에드거와 그의 딸 캐서린도, 이사벨라의 아들 린턴도,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도 말이다. 그가 복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에드거의 모든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린턴과 에드거의 딸 캐서린을 결혼 시키면 가능할 텐데, 린턴은 너무 약하다. 사랑하는 캐서린만큼 지멋데로인 에드거의 딸 캐서린(캐시)을 어떻게 하면 린턴과 결혼시킬 수 있을까? 막으려는 자와 성사시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되지만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속 상항들은 말이다. 그럼에도 납치와 강금으로 캐시는 린턴의 아내가 되고 심신이 허약해진 에드거는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1818년 영국 요크셔 주 손턴에서 태어난 에밀리 브론테. 그녀의 가족력이 대단하다. 『제인 에어 』의 작가 살럿 블론테가 언니고, 『아그네스 그레이』를 쓴 앤 브론테가 동생이다. 1847년에 『폭풍의 언덕』을 발표하고 1847년 결핵으로 서른 해의 생을 마감했으니 『폭풍의 언덕』은 그녀의 유작인 셈이다. 단 한권의 책이 19세기 최고의 러브스토리로 뽑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기도 한 요크셔 지방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가난한 교구목사의 딸인 그녀가 만날 수 있었던 책들의 대부분이 성경과 신화 였을 것이고, 그녀가 만들어 낸 세계는 신화와 성경으로 빗대어져 있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철저하게 삐뚫어져 있는 사람들. 오로지 본인만 정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하녀장, 넬리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폭풍의 언덕』속 인물들은의 세상은 편협하고 관습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환상적인 분위기와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시적 감수성은 서머섯 몸의 말처럼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그 잔인함을 강렬하게 표출해 내고 있다. 165년 후에 독자가 분노하며 읽다가도 케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아닌 캐시와 헤어턴에 아기자기한 사랑에 웃음짓게 만들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