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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1 운동이 일어났을까? - 강기덕 vs 손병희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4
이정범 지음, 고영미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내가 알고 있는 한국사가 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 마다 툭툭 튀어나곤 한다. 역사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역사 소설속에는 슬금슬금 픽션이 들어가 있고, 난 그 픽션 역시 좋아한다. 허구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많은 허구들이 내 역사관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선택을 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알고 있던 한국사와 세계사가 진실이 아닌 듣기좋고 보기좋은 포장이 되어있는 것만 고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들이 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역사 공화국>시리즈다. 분명 아이를 위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나를 더 많이 깨욷쳐 주는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아니 그냥 간과하고 넘어갔던 역사속 진실들이 <역사공화국>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씩 바로 잡혀 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화는 '강기덕 vs 손병희'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 손병희 선생이 누구인가?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서 천도교 3대 교주이고, 3.1 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신 분이다. 그를 민족대표 48인 중 학생대표인 강기덕 선생이 한국사법정에 고소를 했다. 만세 운동 당일, 탑골 공원에서 모이기로 했던 시간과 장소를 불시에 바꿔 군중들에게 배신감을 주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는 무엇인가? 손병희 선생이야 워낙에 유명한 분이기에 알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게다가 민족대표 48인과 학생대표라니? 학생대표라고 해서 십대의 어린 학생은 아니었다. 그당시 학교는 지금처럼 8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라 강기덕 선생은 서른이 넘은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3.1 운동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무오년(1919년) 2월 초에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 독립 선언'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낭독한 '2.8 독립 선언'부터 이야기 해야한다. 이 선언들은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에서 항일 독립 투쟁을 펼치던 애국 지사들에게 큰 희망을 준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로 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동맹국들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만 해당이 되는것이었기 때문에 협력국이었던 일본의 식민지인 우리 나라와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굳이 만세 운동을 준비한 것은, 유럽 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 있는 약소국가나 민족에게도 민족 자결주의 사상을 적용하도록 요구하려는 뜻이 강했다.
'무오 독립 선언'이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점은 기미년의 <독립선언서>와는 차이가 있지만 3.1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민족 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에서 2명이 이름을 올리면서 종교지도자들로만 이루어졌는데, 이는 정치인이나 언론인보다 종교지도자들이 상대적으로 활동하기에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좀더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대표 15명을 포함해서 48명 모두를 민족 대표로 부르기도 한다. 3.1운동은 종교지도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기때문에 평화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엔 고종 황제가 죽고, 황제의 장례식이 예정된 3월 3일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황제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어지럽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하루 앞당겨 일요일인 3월 2일에 시위를 하기로 했었다. 그러다 16인의 기독교 대표들이 예배 때문에 일요일 집회는 곤란하다고 반대를 하게되면서 결국 토요일인 3월 1일로 날짜가 앞당겨 졌다. 문제는 3월 1일 정오를 기점으로 5,000여명의 민중이 모여들었음에도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를 미리 막는다는 이유로 태화관에서 모임을 갖았다는 것이다. 당초 오후 2시에 낭독하려고 했던 <독립 선언서>는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있어서 오후 3시가 다 되어 한용운 스님이 낭독후 "대한 독립 만세!"라고 만세 삼창을 한후 스스로 체포되었다. 처음 정한 방향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떳떳하게 체포되어 시민과 학생들의 안전을 지켜 주었다는 것이 태화관에 모인 대표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탑골 공원에 모여있던 민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흥분해서 폭군으로 변했을까? 지도자들이 태화관에서 탑골공원으로 오는것을 거절하자 학생 대표들의 주도로 역사적인 3.1운동이 시작된다. 정재용 선생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후 만세 행렬은 눈동이 처럼 불어서 서울 시내 전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의주, 함흥, 원산등 북녁 지방에서도 거의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는 그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세가 강했기 때문이다.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지도자들 대부분이 북녘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3.1 만세 운동이 시작된 후 3개월간 전국에서 1500회 이상의 시위에 약 20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중 일제에 살해당한 사람이 7,500여 명, 부상자가 약 1만 6000명, 잡혀간 사람이 약 4만 7000명이나 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불에 탔다고 한다.
민족 대표 33인이든 48인이든 모두가 독립을 위해 애쓰던 분들이다. 물론 스스로 체포되었던 33인 중 옥중에서 뿐 아니라 석방된 후에도 친일 파로 변절된 사람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천도교의 최린이 친일파의 앞잡이로 변절하기도 했지만, 한용운 선생처럼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셨던 분들도 많다. 기미년 만세 운동은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3.1 운동에 참여한 군중이 종교지도자라는 구심점을 잃어 독립운동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점도 있지만, 3.1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종교 단체의 조직을 활용해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점에서 민족 대표의 역할은 중요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민족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들을 통해서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과정, 운동의 의의와 영향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과 함께 민족 대표들의 행동를 한번 쯤은 제대로 보고 과거의 역사로 밀어넣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끔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