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노글리오 자신이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저 언덕 어딘가에 어느 필기사가 쪼그리고 앉아 그가 이 거인의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한때 페노글리오 자신이 그랬듯이 저쪽 세상, 글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 누군가가 <잉크하트>를 쓰고 있는 것일까? (p.205)

판타지 소설에 빠지는 이유는 '어쩌면',' 어쩌면' 하는 생각때문이다. 이런 세상이 있지 않을까? 어떤때는 이렇게 끔찍한 세상이 아님에 감사하고, 또 다른 책을 읽으면서는 이런 세상을 한번 만날 수 있다면 하면서 가슴 설레면서 책을 읽는다. <잉크하트>역시 그랬다. <잉크하트>, <잉크스펠>, <잉크데스>로 이어지는 장편의 이야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말도 안돼'하고 덮어버리면 읽을 일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코넬리아 푼케가 아닌 페노글리오가 만들어낸 세상이 너무나 짜릿해서 놓아버리기 아까웠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여차 저차해서 9권이나 되는 시리즈였음에도 다른 책들보다는 잔잔한 이야기가 많았다. 진짜 세상과 글로 이루어진 세상. 어떤 세상이 진짜 세상인지는 알수가 없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났던 이현세 작가의 <아마게돈>이 생각남은 내 기억속의 그 작품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내 삶을 좌지우지 한다면... 그것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던...
제본사였던 모티머. 그의 입을 통해 책이 읽혀지면서 책 속 세상과 현실의 세상이 섞이기 시작할수도 있다는 것이 <잉크하트>의 시작이었다. 기브앤 테이크는 어느세상에서나 통용되는 것인가 보다. 그가 불러낸 <잉크월드>속 인물들 대신 모의 아내, 테레사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모를 '잉크월드'속으로 들여보내 버렸고, 모와 같은 능력을 가진 메기와 레사가 되어 나타난 테레사가 엮어내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버렸다. 이제 '잉크월드'는 잉크위버라 불리게 된 페노글리오가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니었다. 오르페우스의 말처럼 여기저기서 더러운 웅덩이 속에 저절로 생겨난 장구벌레처럼 이야기가 스스로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뻔한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 스스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의적 블루제이가 되어 애더헤드를 찾아나선 모. 아내를 보내버리라고, 모를 옴브라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왕세자비. 비올란테. 흔한 책의 레파토리는 반복됨을 알고 있기에 남편을 찾아 길을 떠나는 레사. 신기한 열매로 칼새가 되어 남편을 찾아 나서는 레사. 이게 말이 되냐고? 그런것을 생각한다면 <잉크하트>시리즈를 읽을 수가 없다. 이제 페노글리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페노글리오와 함께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오르페우스. 누구의 글이 이야기의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 나이트메어를 불러낸 오르페우스와 거대와 나무와 거인을 불러낸 페노글리오. 이야기 속 두 글쟁이들은 환상이란 이런 것이다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거대한 나무위 둥지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글을 쓰기위해 도와주는 유리 인간들. 날아다니는 파란요정과 무지개빛 요정들. 일각수와 불을 가지고 노는 파이어 댄서들.
처음부터 나는 메기와 함께 했으니 소녀의 편이다. 이야기 속 사내아이가 첫사랑이었던 소녀가 또 다른 이야기 속 사내아이를 만나면서 사랑이 움직일 수 있나를 고민하고, 사내아이들은 자신이 쳐다보는 소녀가 다른 곳을 보고있음에 어찌할지를 몰라한다. 소녀는 분명 이야기 안에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 당연한 듯이 살아가고 있다. 소녀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모든 인물들이 이야기 속 세상, '잉크월드'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말이다. 백색 여인들이 원하는 하얀 책. 그속에 쓰여진 세개의 단어가 드디어 밝혀진다. 어처구니 없게도 외할아버지를 닮아 야비하다 못해 저럴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여섯한 꼬마에 손에서 하얀 책은 모에게 전달되어 진다. 여섯살은 여섯살인가 보다. 자신의 아들에게 아무 정이 없다 하여도 비올란테를 바라보는 야코포는 아이일 테니까. 그의 손에서 전해진 하얀 책과 몽땅 연필. 그리고 '블루제이'가 아닌 '모'가 되어 하얀 책속에 적어 놓는 세개의 단어. 하트, 스펠 그리고 데스. 웃음이 나오는 것은 나뿐일까? . 잊지 말라고. 3부작으로 이루어진 책 제목을 잊지 말라는 듯이 책의 제목을 살뜰하게도 코넬리아 푼케는 이용을 한다
윙크월드는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여전히 다른 세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 방식데로 잉크월드의 일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속 싯구, 어느 노란 숲 속에 두 길 갈라져 있어 양쪽 길 다 가는 한 나그네 될 수 없음이 아쉬워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른 세상에 살다가 잉크월드로 넘어 온 사람들은 이 세상이 환상으로 느껴지겠지만, 잉크월드에서 태어날 아이.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날 아이는 그 세상을 꿈꾸게 될것이다. 가지 않은, 아니, 가보지 못한 길이었으니까. 책속의 인물들을 불러낼 수 있는, '실버퉁'이라 불리던 모와 메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모와 레사의 아이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이야기속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꿈꾸는 아이. 언젠가 그 세상으로 가길 희망하는 아이의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