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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조는 화성을 쌓았을까? - 정순 왕후 VS 정조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39
김준혁 지음, 이남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8월
평점 :
몇 주전에 '홍경래 vs 김조순'에 관한 자음과 모음 책을 읽었는데, 뒤이어 읽은 책이 '정순왕후 vs 정조'에 관한 이야기다. 정조를 읽고 홍경래를 읽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겠지만, 의미없이 읽어버린 탓에 역사의 주인공들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젠 한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자음과 모음의 책을 읽어봐야 겠다. 한국사 법정 시리즈의 순번을 보니 1번이 <왜 위만왕은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할까?>이다. 우리 역사의 처음이라는 고조선부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렇게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을 지나 14권부터 20권까지는 고려시대를 이야기하고 있고, 21권부터 조선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재미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다음번에 읽을 때는 21권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부분부터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하나의 틀을 잡기위해서 말이다.

역사공화국에는 유명한 변호사가 한둘이 아니다. '나정치 vs 백성민', '제왕도 vs 왕패도', '김딴지 vs 이대로' 처럼 쟁쟁한 인물들이 원고와 피고를 대변하면서 역사를 이야기 한다. 이번엔 딴지걸기의 지존인 김딴지 변호사가 정순왕후를 대변하고, 이대로 변호사가 정조를 대변한다. 그나저나 조선 현황을 뽑으면 세종과 정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어떤걸로 정조에게 딴지를 걸었는지 궁금하다. 원고 정순왕후가 대리인 김딴지 변호사를 통해 피고 정조대왕에게 보낸 소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당파를 없애겠다고 만든 탕평책은 자신의 당파를 만들고 신하를 통제하려는 것이었고, 학문 육성의 목적인 규장각은 정치적 도구였으며, 주앙오군영이 있음에도 자신만을 위한 장용영을 만든 정조는 효자라 하면서 할머니인 정순왕후를 핍박한 위정자이고 조선의 정치를 망하게 만든 국왕이라는 것이다.
정조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에 사도세자라는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로 부터 시작해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에 드라마로 소설로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을 했다. 곁가지로 들어가면 세도정치의 시작인 홍국영까지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흔히 알고 있는 현왕, 정조에게 정순왕후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열다섯에 예순다섯의 영조에게 시집을 온 정순왕후는 자신보다 열살이나 많은 세자를 얻었고, 세손이었던 이산은 열살도 차이가 나지 않은 아이였다. 정순왕후의 생각에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었던 어린 세손을 왕으로 만들었으니 거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조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부터 정순왕후가 개입하지 않은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존현각에서 죽을뻔했을때, 대비전 상궁들이 움직였음에도 정순왕후는 모른다 했다. 자신의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독살이 되어가는데도 정순왕후는 아니라 했다. 오죽했으면 '이산'이라는 이름 외에 자손을 더 낳기 위해 '이성'이라고 사용을 했을까?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자신만 못살게 군것이 아니었다. 정조가 죽은후 정조의 어머니의 혜경궁 홍씨를 며느리인 효의왕후 아래로 두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절을 하게 만든 가혹한 사람이었다. 효자였던 정조에겐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의 일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 사도 세장의 무덤은 '원'이 아닌 '묘'로 칭해서 '수은묘'라고 이름이 붙었다. 정조가 국왕이 된 후에야 '영우원'이라 이름 붙여졌고, 수원도호부 화산 일대로 옮긴후에 '현릉원'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사도세자의 복권은 고종때에나 이루어졌으니, 그 긴기간 정조의 한이 얼마나 컸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까지 맣은 사람들은 정조의 정치에 대하여 위민정치 혹은 조선의 발전을 위한 개혁 정치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독재정치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까? 정조가 편애했던 사람들을 규장각에 두면서 친위세력을 만들었다고 주장을 한다. 조선 22대 국왕, 정조는 등극한지 27개월인 1778년 6월에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첫 번째, 백성들을 부유하게, 두 번째는 인재 양성, 세 번째는 국방 정책을 세롭게, 네 번째는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였다. 그리고 인재양성을 위한 기간이 규장각이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한 조선에서 인재라면 서자들도 상관없다는 정조대왕의 생각은 조선의 학문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일이었다.
정조의 친위 군영이었던 장용영을 논외로 하고 정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것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만들어졌던 중앙오군영은 인사권과 군포등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을 수정 한것이 장용영이다. 반대파쪽에서 본다면 철저하게 정조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군대를 만든것이라고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위해서 왕의 친위대가 있는것은 당연한것이 아닌가? 이를 위해 '무사 백동수'로 유명한 '백동수'가 나섰다. 장용영으로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것이다. 군대를 위한 세금이었던 면포, 즉 군포납부를 양반들까지 납부하는 균역법으로 만들고, 장용영의 비용을 마련해줄 토지, 즉, 둔전을 만들어서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하게 했으니, 이런 군대가 세상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장용영은 없어졌고, 그 재산은 정순왕후 측근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책으로 가장 중점으로 삼고있는 내용은 '왜 정조는 화성을 쌓았을까'이다. 엄청난 국가 재정을 낭비하면서 화성을 쌓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화성에서 하고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내려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 원고측의 주장이었다. 정말 국고를 탕진하면서 화성을 쌓았을까? 화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고 너무도 아름다운 성이라는 이유때문이었지만, 외양만 아름다운것이 아니라, 화성을 지을 당시의 백성을 생각하는 국왕의 마음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될수 있었다고 한다. 거중기와 녹로로 힘을줄이고, 일한만큼 철저하게 임금을 지불했다. 당시 총 공사비 87만 냥의 반은 재료비이고 반은 인건비였는데, 이 돈은 왕실에서 검소하게 모은돈과 군대를 통합하여 모은 돈으로 만든 것이었다. 두번째, 화성에서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나이가 같은 사도세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후에 인물일망정 정조에게는 아버지였으니까 말이다. 어머니와 함꼐 회갑연을 열어드리고 싶은것이 자식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상왕제도. 태종을 보면 상왕은 '군사권, 인사권,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국왕이 있음에도 상왕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는 것은 양경체제를 노리고 있던 정조의 불순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한다. 그럴즈음에 체제공이 이야기 한다. 선대왕인 영조가 정조 임금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 사도 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말이다. 국왕으로 있는 동안 아비를 추존하지 못하는 아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왕실의 관습상 세자가 15세가 되어야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으니, 순조가 15세가 되었을 때, 상왕이 되면 새로운 국왕이 할아버지인 사도 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해도 영조의 유언은 어기는 것이 아니고, 정조는 효를 다할 수 있기에 상왕이 된 것이란다.
역사공화국 시리즈중에서 이런 경우는 드문데, 판사는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았다. 가족간의 문제라서 그랬을까? 누가 옳고 그르다를 오래시간이 지나 3자의 눈으로만 바라보고 이야기하기는 힘이든다. 백성만을 위한 위민정치를 하기위해 노력했던 정조였지만, 인간이었기에 실수도 있었을 것이고, 열다섯에 국모가 되어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정순왕후 역시 그럴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조선의 현왕으로 두말하지 않고 정조의 이름을 거론한다. 역사시간마다 균역법과 규장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독살을 했을지도 모르는 정순왕후를 이야기 한다. 정조보다 오래살았기에 정순왕후를 승자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음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정조를 승자라 할수 있을까? 편한 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역사는 선일뿐이다. 하나 하나의 점이 모여 선을 이루는 그 선의 한줄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위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