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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을까? - 브루투스 vs 카이사르 ㅣ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13
박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1월
평점 :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에 상륙하는 순간 시작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건너는 순간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알레시아를 함락시키는 순간 시작되었다.
- 테오도르 몸젠
로마 이야기를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영웅호걸의 모든것을 갖추고 머리까지 좋은 이 남자를 빼고 로마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일지도 모르겠다. 남자들과 이야기를 하면 정말 거품을 물 정도로 할 이야기 많은, 로마, 아니 유럽 역사속에서 한획을 그었음이 틀림없는 '카이사르'. 이 대단한 남자를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로 더 유명한 부루투스가 소송을 걸었다. 억울할만도 하긴 하지. 로마 공화정을 위해 암살을 마다하지 않은 부루투스는 암살자 취급이나 받고 카이사르는 여전히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로마는 공화정을 채택했던 나라다. 공화정이란 나라를 왕이나 황제 같은 한 사람의 지배자가 다스리는 체제가 아니라 국민의 합의로 선출된 사람이 특정 기간 동안 나라를 통치하고, 임기가 끝나면 또 다른 사람이 통치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약 2천년 전부터 이런 공화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09년에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에트루리아인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때 증장한 인물이 부루투스의 선조 '루키우스 유니우스 부루투스'다. 공화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로원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비슷하다. 원로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족출신 집정관, 평민출신 집정관, 원로원 300명, 독재관,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 10명이 공화정을 이끌었다.
공화정을 보면 귀족과 평민이 서로 힘을 합쳐서 잘 꾸려가는것 처럼 보이지만, 당시 로마는 12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큰 전쟁에 휘몰아쳤다. 로마가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을 포에니라고 불렀다)를 물리친 포에니 전쟁이 그것이었는데,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 반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토지는 황폐화되고 전염병까지 돌면서 민중은 약해지고, 전쟁의 승리로 귀족들은 부유해졌다. 이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크라쿠스였는데, 이들의 토지 제도 개혁은 실폐로 돌아가고, 귀족들에게 살해를 당한다.
카이사르는 어떻게 힘을 키웠을까? 정치적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로마 공화국안에서 카이사루는 큰 재력을 뽐내던 크라수스, 로마 시민의 지지를 받던 폼페이우스와 힘을 합쳐서 그 유명한 '삼두정치'를 하게 된다. '삼두정치'를 통해서 카이사르는 네 개 군단의 지휘권을 얻고, 총독 임기는 1년이 아닌 5년으로 정하면서 그 기간 동안 법정에 기소되는 것도 면제를 하게 만들었다. 모든 힘이 카이사르에게 모아지는 것을 공화정 귀족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은 집정관 임기가 끝나가는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속주에서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장군은 루비콘 강 앞에서 모든 군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혼자 강을 건너야 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후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이 칼이 해결해 줄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 루비콘강을 건넌다. 카이사르와 원로원의 대립. 카이사르는 반란을 한 것일까? 무장을 한채 강을 건넘으로써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오르게 된다.
장인과 사위관계였던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깨지면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을 주도하고, 이로 인해 '삼두정치'까지 했던 두 사람은 거의 왼수가 되어버린다.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당하고, 폼페이우스를 따라 이집트로 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탄자에 돌돌 말려져서 배달되어 온(?)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만나게 된다.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권력 다툼 중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지만, 얼마후 카이사르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뒤를 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연인관계가 된다.
부루투스에 의해 죽음을 당한 카이사르. 이제 카이사르가 아닌 암살 이후가 궁금하다. 어떻게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는지 말이다. 카이사르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원로원이 어떻게 옥타비아누스는 그냥 두었을까? 시대의 흐름이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기다릴 줄 알았고 현명했다. 카이사르보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원로원으로 부터 제 1시민이라는 '프린켑스'라는 칭호와 로마 병사들로 부터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받는다. '임페라토르이며 호민관 특권을 보유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는 이렇게 탄생을 한다. 천재적 정치가의 이런 행보는 죽음을 당한 카이사르 덕분이었다.
공화정과 황제치하. 어떤것이 더 옳은 것일까? 로마의 황제하면 네로, 칼라굴라, 코모두스처럼 미치광이들이 먼저 생각나지만, 5현제 시대라는 네르바,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황제치하를 막기위해 카이사르를 죽인 부루투스 입장에서는 무척 원통하겠지만, 왕권 국가를 만든것은 카이사르의 영향이 컸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카이사르는 단지 로마의 전통이라고 생각되고 있던 공화정 체제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로마의 평화, 이렇게 팍스 로마나는 시작된다. 역사공화국의 담당 판자 정역사는 판결을 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판결을 내리던지 내가 느끼는 역사가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