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홍경래는 난을 일으켰을까? - 김조순 vs 홍경래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3
전병철 지음, 조환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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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

 

 국사시간에 배웠던 내용이다.  농민반란. 평안도에서 시작한 농민반란이 처음 홍경래라는 이름을 들었을때 배웠던 내용이었고, 그다음은 최인호 소설 '상도'속 홍경래였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솥鼎의 의미를 숨겨둔 임상옥과 홍경래의 이야기를 통해서 만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뜬금없이 김조순 vs 홍경래를 만났다.  김조순이 누구지?  아하... 순조임금의 장인.  순조를 거꾸로 하면 조순.  이렇게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본격적으로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으로 들어가 보자.  역사적 인물들은 역사공화국 덕분에 편할날이 없을 듯 하다. 툭하면 법정에 서야 하니 말이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나정치 변호사를 찾아았다.  홍경래로 인해서 안동 김씨 가문의 명예가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김조순과 나정치 변호사가 만났으니 반대편이야 어김없이 홍경래와 백성민 변호사가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약이 기대되어 진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고, 공정한 판사는 어떻게 결론을 내릴까?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을 비롯한 인물들의 세도정치는 보는 사람마다 입장은 다르겠지만, 전정, 군정, 환곡을 가리키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겨워진다.  오죽하면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있을때, 『애양절을 지었겠는가?  애양절은 황골이된 아버지와 갓난아이, 즉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僉丁)이라 말하는 것처럼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받아간다는 명목으로 평생을 일해서 가진 소를 끌고가는 것을 본 남편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사건을 글로 적을 것이다.  김조순은 이런 삼정의 문란이 자신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 변론을 하고, 홍경래는 이 모든것이 김조순같은 세도정치부터 시작되었다고 반론을 한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를 시작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왜 평안도 였을까?  그 당시 평안도는 천대받는 곳이었다. 평치나 서한이라고 평안도 사람들을  낮추어 불렀고, 수공업과 광업이 발달했음에도 몇몇 소수의 부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평안도 사람들은 청나라 사신 경비도 부담해야했다.  왜 평안도만 차별을 받아야하나가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였고, 홍경래의 과거 시험 낙방과 함꼐 홍경래 주위엔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홍총각등의 인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평안 갑부 이희저, 글잘쓰는 김창식, 태천의 귀한집 자제였지만, 서자인 우군칙과 충성스런 행동대장 홍총각까지 치밀하게참모를 구성했다.  어디 하나 빠질 만한 사람이 없는 참모들의 모임이다.  그러기에 김조순은 '홍경래의 난'을 반역이라고 반론한다.

 

일사횡관(一士橫冠)하니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니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이라.  

 

 홍경래의 봉기에 앞서 퍼뜨린 이 글귀는 무엇일까?  영 말이 안되는 이것은 파자다.  조선에선 글 좀 안다는 사람들은 어찌 이리도 파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선비사에 한일을 얹으면 임(壬)이되고, 귀신 신에서 옷의자와 비슷한 시를 빼면 신(申), 달릴중 척자를 더하면 일어날 기(起), 언덕구에 두리가 두 있으면 군사 병(兵)이 되어 '임신기병(壬申起兵)'. 1812년 임신년에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뜻이된다.  홍경래의 치밀함을 알수 있는 글이다.

 

 그렇담, 홍경래는 영웅일까, 반역자일까?  홍경래는 의를 위해 봉기했다고 이야기하고, 김조순은 반란이라고 이야기 한다.  1811년 12월 18일밤 청천강 근처 다복동 계곡에서 군사를 이으킨 홍경래는 1812년 4월 19일 정주성 최후 항전을 끝으로 끝을 맺게 된다. 분명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홍경래는 가난한 농민들을 중신으로 광산에서 광부로 품을 파는 이들까지 동차시켜 세력을 키웠지만, 농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반란을 일으켰는가가 아니라 누가 배고품을 없애 줄 것 인가 였고, 조직적이 관군을 이긴다는 것또한 어불 성설 이었다.  분명 홍경래는 참형을 받았고, 관군이 이겼다.  그런데 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속에서 실패로 끝나버린 홍경래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공정한 판사는 김조순이 홍경래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 훼손 및 정신적 피해에 대한 금전적 손해 배상 청구를 기각한다.  왜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삶이 형편없이 무너졌고, 세도 정치 하에서 관의 기강은 무너졌고, 삼정은 문란했다.  절대 다수인 백성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홍경래가 일으킨 봉기는 차별없는 세상, 공평한 세상을 위한 역사적인 행동이었다.  그 봉기가 비록 실패로 돌아갔을 지언정, 그 영향으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가장 하층이라 여겨졌던 민중들의 의식이 점점 커졌으 것이다. 물론, 공정한 판사의 말처럼 정치적 봉기가 언제나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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