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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뭐 다 그렇지. 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난 그나마 다행이었지. p. 58 (키친)
그녀, 미카게. 인생의 절망을 알아버렸다.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녀에게 할머니 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안계신 지금, 알 지 못하던 그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유이치. 할머니가 하시던 꽃집에 자주 들렸다는 이 남자. 왠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신 할머니 앞에서 너무나 서럽게 울던 이 남자. 이 남자의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젠 갈곳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미카게는 그녀, 유이치의 엄마, 에리코를 만난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을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녀가 아닌 그란다. 상관없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굴곡지어 있던. 이제 그들은 가족이다.
미카게는 부엌을 좋아한다. 반듯하게 차려져 있는 부엌도 좋아하지만, 너저분하고 때가 꼬질꼬질한 그런 부엌도 좋아한다. 왜 그렇게 부엌을 좋아하는 지는 모른다. 그냥 부엌이 좋다. 그래서, 그녀는 부엌에서 잠들기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썩뚝 썩둑 칼질하는 소리와, 보글보글 음식 끓는 소리와 흔들리는 음식냄새가 퍼지는 그런 부엌을 좋아한다. 뭔가를 할 수 있는 곳, 아니,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것 같은 곳. 그녀가 요리 연구가의 수습직원으로 들어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적정 온도가 될 때까지 채 기다리지 못한다든가, 물기가 완전히 빠지기도 전에 요리해 버린다든가, 그런 사소한 요소들이 결과적으로 색이나 모양에 어김없이 반영돼 있어, 놀랐다. 그래 가지고서야 주부의 저녁 식사감 정도지 화보로 찍히는 요리가 될 수 없다. p. 79 (만월)
요리에만 빠져야 할것 같은 그때, 유이치의 슬픈 전화가 왔다. 유이치에 집에서 나오고, 그를, 그녀를 만나지 못했는데, 에리코가 죽었단다. 말도안되는 이야기. 꿈이겠지? 그녀를 쫒아다니던 스토커가 에리코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칼을 휘둘렀던다. 가족인데, 에리코의 죽음을 너무 늦게 미카게는 알아버렸다. 아니, 이제 유이치도 고아가 되어 버렸다. 그 역시 절망을 알아버렸다. 이제 그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닐까? 이건 꿈일까? 홀로서기를 하는 사람은 뭐라도 키워봐야 한다던 에리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때, 그가 그립고, 그녀가 그립다. 우리는 뭘까?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유이치가 있으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p.83)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이루어졌지만, 키친과 만월은 하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키친> 이라는데,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나서야,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초기작을 읽으면서도, 혹시 혹시 하는 그녀가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장치를 떠올려 본다. 혹 아닌가? 하고 읽어 내려갔는데, 그녀의 초기 작품은 따뜻하다. 키친과 만월이 지나고 나서 나오는 작품 <달빛 그림자>
나는 인사를 나누며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어린 시절의 흔적만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P.194 (달빛 그림자)
사츠키에게 히토시는 당연한 연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건네었던 방울은 히토시와 떨어지는 일이 없었고, 히토시 역시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달린다. 그의 부재에 가슴아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새벽마다 달린다. 히토시의 동생 히라기. 그는 형과함께 그의 애인, 유미코를 잃었다. 그역시 그들의 부재를 잊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유미코의 세일러복을 입기 시작했다. 형을 닮아 너무나 잘생긴 그가 세일러복을 입고 다닌다. 그녀의 곁에 나타난 우라라.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것이라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날, 그녀는 그를 보았고, 히라기는 세일러복이 사라졌단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그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동떨어진 이야기 같으면서도 <키친>과 <달빛 그림자>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풀어내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살아갈수는 있을까? 요시모토 바나나가 이야기하는 죽음과 남아 있는 사람들.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면서 졸업작품으로 썼다는「달빛 그림자」로 예술학부 부장상을 탔고, 데뷔작으로 발표한[키친]으로는 [카이엔(海燕) 신인 문학상], [이즈미 쿄카상]을 받았단다. 뭐라고 해야할까? 지금의 요시모토 바나나를 있게 한 작품. 지금 그녀의 작품과는 색다른 맛을 느낄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키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