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해너가 속기가 얼마나 유용한 기술인지 늘어놓는 사이 드레스 속에 파묻혀 있던 나는 가슴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작은 믿음이 깨져버린 것이다. 나는 비단과 공단 드레스 틈에 멍하니 서서 산산이 부서진 믿음이 컴컴한 옷장 바닥에 하나의 점으로 조용히 내려앉다가 영영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 P.279

 

"넌 속기를 읽지 못해."

질문이 아니라 단언이었다. 그래서 난 대답하지 않았다.   - P.620

 

이 두페이지에 간극이 숨을 멎게 만들어버린다.

1999년 겨울, 아흔 여덟의 그레이스 브래들리에게 시인의 자살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이 방문한다.

리버튼 저택에서 하녀로 일했던 그레이스.

1924년 여름에 영국 전원의 대저택, 리버튼에서 목숨을 끊은 로비와 그의 죽음을 목격한 해너 하트포드와 에멀린 하트포드.

14살에 어린나이에 리버튼가에 하녀로 들어온 그레이스에 시선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98살에서 14살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 현재에서 에드워드시대로 따라서 넘어가 버린다.

지금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겠지만, 그레이스는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고. 그레이스에 기억속 작은 틈새를 가르며 조금씩 올라오는 기억들은 생생하게 에드워드 시대에 리버튼을

묘사해주고 있다.

리버튼가에 위층과 아래층에 사람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세개의 축을 이루는 데이비드 하트포드, 해너 하트포드, 그리고 에멀린 하트포드.

1914년부터 1924년까지의 리버튼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잔잔하다.

요동을 치는 것도,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책을 펼친 순간부터 670여장에 이루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손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앞으로 책을 넘겼다.

아... 이거였구나. 그래서 그런 말이 있었구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케이트 모튼의 첫번째 소설이 <리버튼>이다.

첫소설이 출간되자마자 30여국에 판권 계약이 되었다는 것만봐도 알수 있지만,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

아흔 여덟의 노부인이 14세 소녀로 변하면서, 그녀의 일상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작고 세세한 이야기들이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여진다. 열 네살 소녀의 감성도, 아흔 여덟 노부인의 감성도 어쩜 이렇게

세밀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노부인에 기억에 깊이 묻혀 있던 충격적인 비밀들.

그녀는 그냥 그렇게 기억 저편에 묻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기억을 되살린 젊은 감독,우슐라가 아닌 손자, 마커스에게 들려준다.

곳곳에서 드라나는 이야기들.

 

사실 저희 할머니 덕에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거거든요. 하트포드 자매들과 먼 친척뻘이세요. 육촌인 것 같아요.

영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셨대요.

제가 말리고 싶어도 안돼요. 플로렌스 할머니는 '싫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으시거든요.   - P. 632

 

리버튼 저택의 호숫가에서 아름다운 두 자매가 지켜보는 가운데 참전용사이자 젊은 시인은 로비 헌터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 P.639

 

숨을 멈추거나, 다른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짧게 짧게 드러놓은 이야기의 진실을 외면해버리게된다.

그레이스에 이야기는 간간히 드러난다. 하인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아닌 다른이와 결혼을 하고

오십이 넘어 대학을 가서 고고학자가 되었다.  알고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누구였더라. 육십이 넘어서 그녀의 첫사랑과 재외한다.

그녀에 이야기만으로도 극적인것이 많을텐데, 극도로 배제하고 케이트 모튼은 그레이스의 시선으로 해너를 바라본다.

그녀와 동년배인 해너를 말이다. 사적을 비밀을 공유한 두 소녀. 그리고 부인과 하녀.

그때는 다 그랬을지라도, 그레이스의 모습은 너무나 숨죽이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작가는 그레이스를 통해서 보는 해너의 모습만이 이미 독자들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을 알았던것 같다.

 

그녀들만의 비밀로 만들어진 이야기속 진실.

그 비밀의 진실을 알았더라면, 그레이스에 삶도 바뀌었을까?

알 수는 없다. 그 또한 그녀들의 비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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