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그리고 가을 - 나의 1951년
유종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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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선생님의 문학평론은 읽은 적이 없다. 문학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교양인이라면 그의 글을 읽고 배울만 했지만, 교양마저 없는 나에게 그는 외계인이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선생님'이 된 것은 그가 정년퇴임 후 일간지 등에 기고한 칼럼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품격있고 균형잡힌 원로의 한 말씀을 그 짧은 글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몇년전 펴낸 회상록 <나의 해방전후>(민음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그 시대를 다루면서 역사학 저술이든 회고록이든 우리의 과거에 대한 저술에 항상 나타나는 판에 박은 패턴, 스테레오타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대개의 저술은 일제시대라면 일제의 억압과 수탈-그로 인한 한국인의 희생, 저항, 투쟁을, 그리고 해방후에는 좌우의 대립, 상호 가학, 억울한 민중의 희생을 기본뼈대로 삼는다.  예를 들어 6.25전쟁기의 개인 일기로 1990년대에 큰 관심을 끈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남과 북의 권력이 각기 얼마나 극악스러웠고 한 역사학자가 어떤 수난을 겪었는지를 담은 책으로 기억한다. 한마디로 순진무구한 한 학자의 수난사다. 그러나 <나의 해방전후>는 일제에 충직했던 한국인(교사, 교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방적 희생자만이 아닌 협조자,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한 가해자의 모습이다.

이번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도 전쟁중 한국인의 새로운 초상, 그에 관한 새로운 화법을 보여준다. 1951년 전쟁의 후방이라 할 충북 청주-강원도 원주의 미군물자하역장에서 16세 중학생 소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잔인한 학살자도, 억울한 희생자도 아니다. 대신 그는 난리통에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비루하고 교활하고 뻔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난민을 막으려고 돌림병이 도는 마을이라는 방을 마을 어귀에 내붙인다. 미군부대에 빌붙는 것이 유일한 생계 길이었기에 미군에 아첨하고 이미 빌붙은 한국인에게 아첨한다. 그러면서도 여차하면 미군을 속여 물자를 훔치고 허위로 일당을 계상하며 약한 입장의 노무자를 갈취한다. 16살 짜리 아들에게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채근하다가 아들이 미군 노동사무소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을 다행스러워하고 그 아들의 청탁으로 잠시나마 취직까지 한다. 딸 하나를 거느린 젋은 여인은 대학생 미군 통역에게 몸을 의탁해 생계를 잇는다. 수복후 학교에서는 형편없는 실력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인간성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 책에는 정말 여러 인물의 인간성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를 그 개인의 허물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당시 어디서나 그런 일은 횡행했을 것이니, 당시 한국인의 한 초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좌우의 대립이나 잔인한 가학, 억울한 희생이라는 거대 프레임에 새로운 틀이 더해질 필요가 있겠다. 

'비루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저자가 보여주고 싶어한 주제는 아니다.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읽도록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여러 곳에서 한탄한 '문화적 황무지'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밖에 삶과 사회의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주는 촌철살인의 문장도 많다.  예를 들어

"별것 아닌 것이 강제된 죽음의 사유가 되는 것... 아는 사람이 찾아와도 별 반갑지 않은 난시.... 많이 기억하는 쪽이 약자이며 강자는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가난은 궁상맞을 뿐이다... 문화적 기억에 매개되어 사물을 바라본다..."

책 머리말에 적은 경구는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 6.25는 우리에게 결코 잊혀진 역사가 아니지만, 잘못 기억되는 역사라는 점에서 아마도 저자는 그 시대를 제대로 기억하자고 말하는 것이리라.

유종호 선생님 같은 분들은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이미 큰 공헌을 한 분이다. 퇴임 후 그냥 푹 쉬셔도 아무 허물이 안될 것이다. 그런 분이 이런 좋은 책까지 남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3부작의 나머지 한 권도 마저 선사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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