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벌레라 하면 우선 윙윙거리거나(날벌레) 꼬물거리는(애벌레 등) 게 떠오른다. 징그러움이나 성가심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움직임'을,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먼저이리라.

저자가 소개한 책벌레들은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거개가 중고등학교의 국어나 역사 시간에 들어본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과 업적 제목만을 알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그러한 업적을 냈는지 거의 전혀 모른다. 그들은 한 마디로 살아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 책은 그들이 살아움직이는 인물들임을, 욕망과 야심과 아픔을 가진 인물들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우선 왕성한 지식욕의 소유자, 탐독가요, 장서가다. 그들은 새 지식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고 새 지식을 접하면 즐거워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자 한 인물들이다. 세종이 하도 책만 보니 아버지 태종이 책을 감추어 버리기까지 했다 하고, 밥 먹을 때도 책을 옆에 펴놓고, 밤잠도 안자고 책을 봐서 눈병이 날 지경이었다 하고, 퇴계는 주자대전을 공부하고픈 생각 때문에 벼슬까지 사양했다고 하며, 유희춘은 책 좋아하는 것이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고 한다. 

벌레가 각기 다르듯이 조선의 책벌레들도 제각각이다. 저자는 이 인물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책 읽는 바보' 이덕무는 천재였으나 서파로서 조심조심 평생을 살아야 했다. 반면 권력자 정조는 책으로 책을 탄압한 무서운 인물이었다. 세종은 책에서 읽은 지식을 현실에서 구현하여 조선의 문화를 만들어냈으나, 이익과 정약용, 서유구 등은 관직에서 축출되어 유배지나 집에서 '당장은 알아주지 않는' 독서에 매진하였다. 재능이 넘쳐 경망되기까지 했던 허균, 오늘날 같으면 감수성 뛰어나고 관찰력 예리한 뛰어난 작가로서 명성과 칭송을 누렸을 이옥, 엄격한 도덕선생님 조광조, 발음은 몰라도 영어 책을 술술 읽은 신채호...등 우리는 이 책에서 이 책벌레들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맛볼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의 허황된 자대(自大)의식을 부순다. 우리는 고려인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걸 자랑한다. 저자는 금속활자란 다종의 책을 소량씩 제작하는 데 쓰였고 그 책도 지배층이 이념과 도덕주의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지, 서양처럼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데 쓰인 바가 전혀 없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실학이나 정조에게서 자생적인 근대의 기원을 찾는 데 대해서도 그것이 허상임을 지적한다. 과대포장된 역사 지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저자의 삼십년 가까운 공부에서 나온 것일 터인데, 그를 손쉽게 맛볼 수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출판사의 예쁜 제책에서도 정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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