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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ㅣ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평점 :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 제목과 그를 소개하는 서문에 매료되어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알던 선조와는 다른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은' 선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결과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선조를 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전에 알던 '별 볼일 없던' 선조 그대로였다. 절반은 저자에게 속은 느낌이다.
새로운 선조란 무려 40년 넘게 왕위에 있었고 신하들을 적절히 다룬 왕으로서의 선조다. 사실 조선왕 노릇 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다. 날고 기는 천하의 인재들이 모인 조정에서 그 말빨 좋은 신하들의 이런 저런 주장들을 듣고 의사결정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쫓겨날 수도 있는데, 그 드센 신하들을 이끌고 가는 것은 왠만큼 강하고 총명하지 않고선 어려운 일이다. 단명한 왕들도 많은 걸 상기하면, 40년 넘게 왕 노릇을 한 선조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 전임인 명종이 서자 계열의 별볼일 없던 8살 시절의 그를 만났을 때 왕관을 써보라 하자 그의 형들은 한번씩 써봤으나 그는 신하가 어찌 임금의 왕관을 쓰겠냐고 고사했다는 것이나 부모와 임금 중 누가 앞서냐고 질문받았을 때 충효는 중요하기가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보면, 그가 총명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당쟁을 왕권 유지에 적절히 활용했던 것은 그의 영리한 일면이리라. 그러나 여기까지다.
왕위에 오래 머물렀다는 게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당쟁이 일어나고 당파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났건만 그를 자신의 권좌 유지에 활용했을 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진왜란을 막지 못하고 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절히 대처하지도 못한 것은 그의 최대 실책이다.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겠으니 길을 내달라고 공공연하게 알렸는데도 선조는 전혀 대비한 바가 없고, 파죽지세로 일본이 밀고 올라오자 도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도망갔으며 아예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도피하려 했다. 명나라가 거부해서 멈췄을 뿐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왕이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임금이 도망간 길을 왜군에게 알려주고 왕자를 잡아 왜군에게 넘겨주었겠는가.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3국 중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는데 조선은 이씨 왕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점 때문에 저자는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라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적절치 않다. '넘는' 것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주체가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선조는 난세에 기절했다 한참 후 정신차려 보니 난세가 끝났더라는 쪽이 아니었을까. 난세에 기절한 왕, 나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