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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민들
백민석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면 여행 가이드북을 보는 편이지, 여행 에세이를 보는 편은 아니다. 필요한 정보들로만 잘 짜여져있는 가이드북이 여행을 하는 내내 꽤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블로그나 여타의 SNS를 잘만 찾아도 웬만한 맛집과 관광지는 다 찾아갈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선호도가 여행 가이드북에 치우쳐져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여행 에세이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올라간 느낌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도 여행과 관광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저자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휴가 때 떠나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라는 조금 더 가벼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저자 역시 노동이라는 요소가 포함된 여행보다는 관광 쪽에 더 맞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이 책은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머무른 곳에 대한 글을 쓴 저자의 이야기이다. 여행 정보가 아예 없지는 않고 저자의 글이 곧 정보가 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때에 이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고 해도 관광 정보로서의 충분한 가치 역시 지니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멀다는 것 하나였다. 낯설기도 하지만 뭔가 어려운 나라의 느낌이 들었던 러시아에 대한 편견은 이 책에 실린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면서 한 순간에 날릴 수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저자가 찍은 사진 속 모든 순간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만났던 어떤 아이 1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낯선 사람이 사진을 찍는 것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고, 물론 셔터를 2회 이상 누르면 그들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다고 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셔터의 수가 늘어날수록 의심의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은 불과 러시아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의 동선을 따라 산 넘어 있는 호텔에도 가보고, 박물관에 가기도, 미술 작품을 구경하기도 하며 저자가 소개하는 러시아를 따라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모 TV 프로그램에서 했던 것이 떠올랐다. 보면서도 저걸 타는 것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 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고 한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듯한 계절에 읽는 느낌을 주는 러시아의 시민들, 저자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다 읽어버리게 된다. 박물관에서 만난 할머니가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인데, 러시아는 외투를 벗어야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날따라 내의만 입고 패딩을 걸친 저자에게 박물관에 가이드를 하는 할머니께서 외투를 벗으라 했고, 그 일로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외투를 벗어야 하는 것에 대한 낯설음도 있지만, 그 안에 입은 것이 없어 벗지 못하는 저자의 웃지못할 상황을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났다. 러시아의 대단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기가 아니라 러시아의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이 나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삶 속에 마치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시간, 이 책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