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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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산문집.

제목부터 애주가의 향기가 물씬난다. 작가가 말하는 술에는 짝꿍인 다양한 안주가 등장한다. 까다롭고 짧은 자신의 입맛을 확장시켜준 것이 소주라 할 정도로 술이 그녀의 미각적 도약을 도와준 일등공신이었다. 그로 인해 이젠 삭힌 홍어까지 먹을 정도로 못 먹는게 없어졌다고 한다. 나중엔 맛있는 안주를 먹기 위해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할 정도가 됐다고 하니 웃음이 나온다.


작가의 글 속의 관계와 추억에는 모두 술과 곁드린 안주가 은은하게 흐른다. 그녀가 표현하는 진수성찬은 나에게 익숙한 것도 있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있다. 제철 재료와 손질 과정, 먹는 기쁨, 함께한 사람, 그때의 계절과 향기가 어우러져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글들에게서 '신남'이 느껴진다.

개인적인 행복의 감정이 독자인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갑자기 순대국과 만두, 김밥이 먹고 싶어지고, 누룽지와 명란달걀찜의 조합에 무릎을 치게 된다.


아는 맛은 아는맛대로 그 표현에 공감하게 되고, 새로운 조합은 그것대로 입맛을 다시게 한다. 생각보다 많은 식욕을 불러 일으킨 즐거운 책이었다.




그냥 먹어도 되지만 나는 국자로 만두를 눌러 대충 터뜨려 먹을때도 많다. 참 뜨겁고 맵고 맛있다. 먹고 난 뒤에도 든든함이 오래간다. 때로는 내가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해장 만둣국이 먹고 싶어 술을 먹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피로한 강아지풀 같은 기분을 맛보기 위해 좀처럼 하지 않던 공부를 몰아서 하고 도서관을 나서던 그 봄처럼.

36p (만두다운 만두)


차지고 부드럽게 후루룩 넘어가는 회와

오독오독 씹히는 해산물과

싱싱한 야채와 매콤새콤 국물까지

그야말로 통괘하고 상쾌한 맛이었다.

땀과 더위와 앞으로 써야할 글의 부담까지

한방에 날려버리는 맛이었다.

91p (물회, 그것도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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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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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발간된 대중 여성 잡지였던 <신여성>. 이 책은 당시 여성사의 생생한 자료가 가득차 있어 차림새, 풍경, 문화가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또한 무거운 학술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고 생각보다 가독성도 좋고 인용문들도 독자의 편의를 위해 한번씩 매만진듯 하다.


과거 신여성들은 '다르게' 차림으로써 '구'가 아닌 '신'이 되었다. 모던하게 보이고자한 그들의 스타일을 하나씩 살펴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0-30년대 헤어스타일인 '단발' 이었다.


또한 신여성은 도시로 숨쉬는 여자였다. 신교육과 신문물이 존재하는 도시 경험이 필수였고, 도시 문화를 향유한다는 점에서 신여성 구여성이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이와중에 또 흥미로운 점은 1933년에 크게 유행한 권투의 경우, 경기 구경에 남성보다 여성이 더 열광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근대도시의 신교육과 신물물과 함께 '밖'으로 나온 100년전의 신여성을 시작으로 그녀들이 했던 투쟁, 받았던 편견과 비판, 소비와 허영과 함께 남성의 욕망이 뒤섞여 본질을 흐려 놓아도 결과물을 보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그 모습이 점점 새롭고 다채로운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데 거름이 된 듯하다.

19세기 말 부터는 점점 학교에 가고 직업을 갖는 여성이 늘어난다.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 '여자', '어머니'라는 높은 장벽을 넘고 점차 개성을 찾아가는 길, 하지만 이것을 '해방'이라고 마침표 찍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지금의 여성인 내가 100년전 여성들의 모습을 마주보며 역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느낀다. 그들의 고군분투로 지금의 내가 누리게 된 것은 감사히 누리고 이제 내가 알아야 할 앎의 몫과 힘써야할 개인의 몫에 대해서는 어떤게 있는지 깊게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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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남성의 '시선'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들의 불온한 무게감을 감지하는 것이야말로 <신여성>의 페이지를 읽어내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일 터이다.

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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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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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좋은 점이 한가지 입장에서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야기 속 숨겨진 여러 시각과 갈래들을 따라 이리도 들춰보고 저리도 들춰보며 과거의 사건을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거기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당시의 문학과 영화, 노래들도 많이 인용되면서 일단 읽는데 재미가 있고, 모든 것들이 역사에 줄기에 얽혀있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역사에 휘말려 있는 연루자' 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타이와 미얀마를 잇는 철도를 놓는 곳 콰이강의 다리위에 조선인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서술하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흑과 백처럼 가려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시기는 어쩌면 일본인보다 같은 민족인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게 당하는 수모가 더 치욕스러웠다.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확실한 가해자 같은데, 종전 후 전범 재판과 그 이 후의 가혹하고 기구한 조선인 포로 감시원의 삶을 보면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재판에서 사형 당한 일본인은 고작 일곱명이었는데, 조선인 포로 감시원은 14명이었고, 이후 풀려난 기시노부스케 같은 경우는 A급 전범인데도 총리까지 하고 잘먹고 잘산다. 그렇다고 해도 전범의 가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62P)" 가해의 사실을 쉽게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바로 역사 안에서 '내 몫의 책임'을 헤아려 보는 것. 나는 몰랐고,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라 책임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킴으로서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건에 제대로 휘말려야 문제가 보이고 해결책을 찾듯 역사의 앎과 책임은 비록 일인분일지라도 그것만이 우리가 과거와 미래의 들어갈 수 있는 열린 틈이라고 희망한다.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해 두 단계에 걸쳐 상이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에는 한가지만 선택적으로 기억되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단계의 전쟁 기억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대일본제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최종 단계의 전쟁 기억은 일본인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과 고통들에 대한 일화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전쟁 기억은 후자로 귀결됐다. 무조건 항복과 도쿄전범재판으로 전쟁이 범죄화되자, 일본인들은 전쟁 전반부의 영광스러운 군사적 전진의 기억을 묻어버린채 전쟁 후반부의 고통스러운 경험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3-44p <너의 이름은>, 기억함으로써 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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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풍경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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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권을 합본한 책인데, 난 1권의 작품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그나츠 데너>.


빈곤한 가정을 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안드레스 부부에게 뜻밖의 귀인이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이그나츠 데너. 그는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 부부에게 돈과 보석을 준다.

처음엔 행운이라 생각해 감사해하지만,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어느 순간부터 안드레스는 데너와 함께 있으면 몹시 섬뜩한 느낌이 들게 된다.

마음속으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을 풀지 않으며 데너를 주시하지만, 한 순간에 악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언제나 경건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스는 심한 비탄에 죄 없이 벌을 받게 되는 상황까지 몰린다.

<밤 풍경>에 수록된 호프만의 작품들에서는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파멸로 이끄는 격렬한 광기와 거기에서 오는 공포, 기이한 현상과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환상에 대한 묘사다.

19세기 유럽, 그로데스크한 환상, 불안하고 두려운 본성의 공포, 인물과 서사가 뒤섞여 그 시대의 온갖 이야기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아이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구해줘요, 내 아이를 저 악당의 마수에서 구해줘요!"

끔찍한 상황을 직감한 조르지나가 막 집안으로 들어서는 하인을 향해 외쳤다. 하인은 얼른 도끼를 들고 문을 부쉈다. 독한 냄새를 풍기는 증기가 두 사람에게 훅 밀려왔다. 조르지나는 단숨에 방안에 뛰어들었다. 아이가 벌거벗을 채 사발 위에 누워 있었고, 아이의 피가 사발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p110 <이그나츠 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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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식료품점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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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의 펜실베니아 포츠타운. 이곳에서 흑인 아버지와 유대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존하는 이 땅에 '치킨힐'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세웠다.

당시에 미국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과 이민자들이 흑인과 다름없이 차별받고 외면 당했다. 순수한 미국 사회에 진입하지 못했던 이들은 서로가 작은 파벌을 만들어 살아갔고, 그들 사이의 관계도 관용이나 연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전에 읽었던 <어메이징 브루클린>에서도 느낀거지만 맥브라이드 작가는 소설 속 모든 인물을 주연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모셰와 초나, 이삭, 패티와 페이퍼, 네이트와 애디, 그리고 도도... 소설을 덮어도 각 인물의 이야기의 전과 후도 궁굼해진다. 아마도 그 시대 살았던 소시민의 삶 같이 느껴져서 그런것 같다.

당시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펜허스트 정신병원에 12살 흑인 소년인 도도를 수용하기로 정부에서 결정하자, 도도를 구하기 위해 모두가 할 수 있는 각자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지어 살았던 약자들이 도도 사건으로 인해 다같이 힘과 생각을 모으게 된 것. 분리에서 통합이 이루어지는 부분.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으로서 선한 의지를 지키기 어렵다. 소설에서 말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각자의 삶에서 선한 태도를 행하며 사는데 다양한 형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선한 태도와 의지라는 것도 내 안의 편견에서는 굉장히 평면적이었다.

휘몰아치는 서사가 없이 잔잔한 리듬에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삶의 결들이 쌓이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레딩으로 옮기면서 모셰에게 극장을 팔고 자신과 함께 이사하자고 주장했을때, 초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세우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111p

유럽에서 집을 찾아 떠도는 유랑민족처럼, 버지니아 해안에 내려 대서양 너머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서아프리카 부족민처럼,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삭, 네이트,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하나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듯,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들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미래였다. 이곳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얻은 풍요로움이 어느날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자신들의 뿌리 깊은 전통과 역사가 10초짜리 광고로 전락하고, 의미 없는 휴일에 애국심 높이는 스포츠 경기나 내보내며 선조들이 험난한 투쟁과 자랑스러운 과거는 잊고 현란함에만 열광하는 미래.

2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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