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서가명강 시리즈 37
천명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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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천명선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좋은지 아닌지를 따졌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좋은 것들에도 무수히 많은 요인이 있고, 반대로 좋지 않은 것에도 이유는 여러 갈래로 쪼개진다. 그렇게 자잘한 이유는 차치하고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단순하게는 불통과 크게는 이질감이리라. 소통이라는 것이 비단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언어적 몸짓이나 눈빛, 또는 감정을 드러냄으로 서로 오가는 정보 또는 교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감각과 더 정교한 방법으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것에서 오는 이질감도 이유 중 하나이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범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다르다는 표현이 조심스럽지만, 일단은 쓰겠다)는 것에 의심이 없다.

 

그럼 여기에서 또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의 존재까지 싫으냐, 그건 절대 아니다. 책에서도 나왔지만 몇 해 전 호주 산불 때도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야생 동물들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동물이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지겠구나. 그로 인해 인간도 피해를 봤지만 정작 수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동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나. 아이들과 야영지를 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커먼 풍뎅이가 날아 들어와 어서 잡으라 악다구니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여기는 이 친구들이 사는 곳이라 우리가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들을 잡지도, 죽이지도 말아야 한다고, 산 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 책은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단순하게 반려동물에서부터 지구를 공유하는 모든 동물에 관한 이야기다. 서두에서 말한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이질감에 대해 저자는 결코 다르지 않다 이야기한다. 생김새가 다른 것이라면 온 세계 사람 모두를 합쳐도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듯이 겉모습이나 습성이 다른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다만, 인간보다 늘 열등한 존재로 그들을 대하는 우리는 과연 그들보다 우등한가? 되묻는다.

 

재작년부터 기후나 환경에 관한 책을 보면 으레 드는 생각이, 인간에 대한 혐오다. 그래 혐오다. 인간은 당최 어떻게 생겨먹어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욕심 많은 존재인가? 열등과 우등을 넘어 우리 인간이 동물을 제대로나 이해할 수 있나 말이다. 우리와는 다른 영역으로 소통하고 살아가는 동물의 다양하고도 특수한 능력을 우리가 무슨 수로 설명하고 이해한다 말할 수 있는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도 그렇다. 그 말의 전제는 사람보다 못한데 어쩌다 한 둘의 동물은 사람보다 낫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을 구조하고, 인간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에게서 우리가 흔히 느끼는, 그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동물. 왜 우리는 동물에게 인간다움을 필요로 하는가!

 

무슨 복을 타고나서 호모 사피엔스가 여태까지 살아남아 마치 지구, 아니 전 우주가 자신들의 것인 양 설파하지만, 그저 인간도 이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개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게 된다.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즉 애호가들에게만 동물의 생존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 보호받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동물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 말은 마치 나는 아이를 싫어해, 나는 보수당을 싫어해, 나는 목소리가 큰 사람을 싫어해 와 같이 소신과 가치가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말 할 수 있었던 건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동물의 삶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권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호가만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인류세, 홀로세와 함께 툴루세라는 용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기 위해 함께 번성하고 협력하는 태도와 방식이 필요한 지금, 새로운 친족 형성으로 비인간 존재와 함께환경에 대한 책임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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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의 시간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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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잊어버린 영화 티켓들을 전시하지 않아도 나는 책을 쓰고 영화를 사랑한다. 누구의 인정도 동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고요하고 나지막한 나의 취향, 나의 삶이다. 17

이따금 언어,라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골몰한다. 모국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쩌면 모국어이기에 불가능한 그것을 타인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당겨와 써야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결코 한 뼘도 벗어나지 못할 고작, 그것뿐일 말들.

누군가의 말, 특히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인다. 눈길을 열어 검은색 선들로 그려진 글자를 바라보면서 고작, 그것뿐인 나의 세계에 적지 않은 훈풍을 불어 넣는다. 희한한 것은, 눈으로 활자를 쫓는다 해서 그것이 곧 하나의 언어로 나에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국어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 그 언어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책 <낮달의 시간>은 언어로 다가오는 무수한 단상들에 대한, 운치 있는 사고의 시간을 안겨주었다. 인스타에서 우연히 본 글귀를 타고, 타고, 타고 가니 이 책이 보였다. 이 책을 쓴 저자의 화사한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았다. 책의 표지가, 그 색감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예뻐서 꼭 손에 쥐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책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보고 싶었고, 글자를 읽어내며 얻게 될 언어와 그 단상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짧은 글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좁은 세계에 인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자신이라 말하는 그녀는 ‘가차 없이 살아갈 것’을, ‘떠나야 할 때를 아는 낙화처럼 기꺼이 아름답게 스러져 갈 것’을 다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서 그것들을 언어로 옮겨놓은 글은, 읽었다고 아는 것이 아닌 담고 있는 감정과 모습이 하나씩 그려져 다 읽고 난 후 하나의 전시회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국어라고 다 읽을 수 없고, 자국민이라 해서 나누는 말들이 다 대화가 되지 않는 세상. 우린 타인을 해석하려 애쓰고 그런 일련의 일들의 가치를 곱씹어 본다. 낮달의 시간, 홀로 남겨지지 않을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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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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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서은국

“아이를 보는 눈빛에 꿀이 뚝뚝 떨어지네요.”
얼마 전 중앙도서관 독서회때 등교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갔다. 두 시간동안 진행되는 독서회, 늘 그렇듯 1층 아동자료실에 아이를 두고 2층 강의실로 갔다. 혹 무슨일이 있으면 엄마를 찾아 오라 이르고 강의실 위치를 알려줬다. 1시간 가량이 지났을 무렵 강의실 유리창 밖으로 아이의 치맛자락이 보인다. 웬만해선 찾아오지 않는 아인데 그날은 무슨 바람인지 강의실로 찾아와 입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안을 살핀다. 모임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시선이 아이에게로 갔고, 이내 참여자분들도 아이의 존재를 알아챘다. 애써 아이를 무시하고는 이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자꾸만 아이에게로 눈길이 갔고, 그럴때마다 아이에게 곧 끝나간다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걸 본 한 참여자가 말한다. 정말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본다고.

나 같은 경우는 아이를 낳고 비로소 삶의 의미를 진하게 느낀 케이스다. 이전에는 없었던 생경한 감정이고 행복이다. 이따금 아이에게 말한다. 엄만 너를 만나려고 여태 살았던 것 같아. 너가 엄마 딸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아.

<행복의 기원>을 이야기 하는데 왜 아이를 들먹이냐고, 나의 아이가 나에게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또는 생물학, 또는 뇌과학으로 이 ‘행복’을 설명하면 저자의 말마따나 생존과 번식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새우깡’을 예로 행복의 매커니즘을 이야기한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1독을 권한다) 새우깡 자체가 아니다. 새우깡을 먹을 때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즉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행복을 기원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쾌감 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라 일컫는다.

여기서 나의 아이를 떠올린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아이를 기르는 일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평생 스스로를 옭아 맸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행복이라는 것이 물질적 풍요나 안정보다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경험을 나누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매 순간이 행복 그 자체였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시한’ 즐거움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하다못해 컵에 물을 따르는 아이의 모습에서도 행복을 느끼고(생각해보라, 내가 먹여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단 한방울의 분유도 먹지 못하던 동물이 버젓이 스스로 물을 따라 마시니 경이롭고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식당 테이블에 조각 휴지를 깔아 수저를 올려주며 “엄마는 바닥에 놓는거 싫어하니까!”라고 말하는 순간에 거짓말 조금 보태 그 자리에서 녹아내릴 것만 같다. (단순한 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혹은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본인의 사고 안에서 상대의 취향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어찌보면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의 태도다)

행복의 순간을 강도가 아닌 빈도로 바라보면 아이가 눈을 뜬 아침부터 눈을 감는 밤까지 매 순간이 행복이다. 그저 저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칠만큼 행복하다. 내외향형 성향이나 긍부정적 성격을 이야기하며 인간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의 질이 결정된다 이야기한다. 외향형인 사람이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 현대인의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오랜 연구 결과가 쉽게 간과되지 않는 이유다. 아이를 출산함으로 인해 내 곁에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을 둘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밀착되지 않아도 나에게 하나의 의미이자 존재인 누군가를 그것도 나로 인해 세상에 놓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 가슴이 뻐근하다.

오늘 아이와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에어컨 바람에 아이가 추워했다. 따로 가디건을 챙겨가지 않아 당황했는데 그것도 잠시, 중간 팔걸이를 올리고 아이에게 다가가 두 팔로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잠시 뒤 아이가 말한다. “엄마가 안아주는 게 제일 따뜻해.” 허리가 아픈것도, 다리가 저린것도 중요치 않을만큼 아이와 나누는 그 온기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영화를 보느라 우는 줄 알았겠지만 아이와 나눈 그 뜨거운 시간에 감사함이 밀려왔다. 극장에서 나와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아이가 내 손을 잡았다. 인도가 따로 없어 앞뒤로 차가 오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는데 그런 내가 정신 없어 보였는지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엄마도 이 쪽으로 와” 걱정한다. 식당에 앉아 잠시 핸드폰을 보며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아이가 일어나 셀프 반찬대로 가 야무지게 반찬을 덜고 오고, 테이블에 휴지를 깔아 수저를 놓아준다. 그저 ‘잘컸다’는 말로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한 사람으로서 앞에 앉은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책의 마지막 문구에서 오늘 그 식당에서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191

나의 행복 압정들을 온 사방에 흩뿌려 둔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오랜 책벗들과의 책모임, 카페에 앉아 글쓰기, 늦은 저녁 베란다에 앉아 아이와 간식 먹으며 영화보기, 아침에 일어난 아이 헝클어진 머리 뒤로 쓸어 넘겨주기, 밤비랑 카페에서 세시간씩 수다 떨기, 희망이랑 요가하기, 남편이 만들어주는 요리먹기, 커피 나누기에서 아포카토 먹기, 새벽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는데 열린 창으로 새소리 듣기등. 나만의 행복압정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행복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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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 교수의 언어감수성 수업 -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말하기의 힘
신지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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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하고 돌아와 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아이, 잠시 후 바지만 입고서는 러닝(속옷으로 입는) 셔츠를 들고나온다. “엄마, 반팔이 없어서 이거라도 입어야겠어.” 저만치 서서 “그래, 집에서는 그거 입어도 돼. 더운데 잘 됐네. 훨씬 시원해 보인다.˝라며 미소 지었다. 몸을 돌려 빨래를 정리하다 말고 퍼뜩 생각이 나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아야. 엄마가 어제 책에서 봤는데, 반팔이라고 하지 않고 반소매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반소매?”
“응. 반바지도 반다리라고 하지 않고, 민소매도 민 팔이라고 하지 않는데 왜 반소매 옷은 반팔이라고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아이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반팔의 적확한 뜻은 팔이 반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팔이 반인 사람들에게 ‘반팔’이라는 말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불편한 말을 굳이 쓸 이유는 없다고, 얼마든지 순화해서 바꿀 수 있는 용어들은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찬찬히 설명했고 아이는 그러마라는 뉘앙스를 내비치고는 소파로 가 앉았다.

전작 <언어의 높이뛰기>를 인상적이게 읽었다. 독서모임도 진행하면서 우리가 쓰는 일상적인 용어들에 담아 내뱉었던 선량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교수님의 신작을 보자마자 서평단 신청했고, 운이 좋게도 따끈한 신작을 감사하게 읽었다. 몇 대 몇 식으로 전작이냐 신작이냐를 따진다면 나는 신작이다. 이번 신작이 특별히 좋았던 점은 바로 ‘관계’였다. 부제가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말 하기의 힘’이다. 관계로 바라보는 언어, 즉 말 하기의 문제점들과 시사점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예리하고도 친절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특별히 ‘말하기’를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인간관계.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하는 데에 이 ‘말하기’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겠는가. 단순해 보이는 ‘호칭’문제만 봐도 쉽사리 알 수 있다.

호칭은 정해진 직책이나 위치, 성별이나 지위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생각보다 중요한 말임에도 무수한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혹은 (그릇된)의도를 십분 담아 상대를 부른다. 대상을 부르지만 대상이 아닌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든 호칭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아가씨, 아줌마, 언니 등 어딜 가나 여성 직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불리는 이 호칭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혹은 친근하게까지 보이지만 호칭을 쓴 사람의 진심은 좀 더 부정적 의식이 깔려 있다. ‘간호사 언니’라고는 말하지만 남자 의사에게 ‘의사 아저씨’ 혹은 ‘의사 오빠’라고 하지 않는다. 재래시장 상인들에겐 아줌마라고 하면서 백화점 주방용품 매장 점원에게는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말 곰곰이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적절한 호칭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요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 즉, 매 순간 재고하고 곱씹고, 바꿔나가는 변화의 정성이 필요하다. 책은 호칭 문제뿐 아니라 대화에서 필요한 언어 감수성을 비롯 높임말과 반말이 내포하고 있는 연령 권력과 다중을 앞에 둔 말하기에 필요한 발언권 및 소통의 목적 등 한 번쯤은 인지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다뤘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기회가 닿아 가까운 곳에 텃밭을 분양받았다. 비용을 따로 낸 건 아니고 지인의 공동체가 운영하는 모임에 더부살이로 끼어 함께 하게 되었다. 아이뿐 아니라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텃밭으로 가게 되었다. 농사를 해본 적 없는 나는 땅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기존 참여자분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어느 정도 다져진, 그러니까 단순하게 가서 심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사 만만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다. 밭으로 가보니 돌과 나무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땅을 일일이 골라내고 다져 모종을 심을 수 있게 처음부터 모든 걸 다 해야 할 터, 순간 당황했지만 나름 깡다구 있는 성향이라 주저 없이 호미를 들고 작업에 착수했다. 잠시 뒤 기존 참여자분이 ‘아빠’를 찾는다. 보통 처음에는 아빠들이 와서 땅을 다지고,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아빠는 그럼….” 안 오냐는 말을 흐릿하게 줄이셨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아니나 다를까 땅을 골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고됐다. 아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물을 먹으라 이르지 않았는데도 저희들이 알아서 물통을 연신 기울였다. 뜨거운 태양빛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파며 크고 작은 돌들을 꺼내는 일은 힘들었다. 순간 함께 간 친구가 말한다. “와, 이거 진짜 애들 아빠가 있어야겠다” 엄마가 말을 하니 아이들도 주르르 “그래그래, 아빠가 와야겠어.”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 순간 뭔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지 않고 말했다. “아빠가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빠 없는 아이들은 이런 것도 못해? 아빠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물론 친구가 어떤 저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는 일. 그렇게 스며든 언어 차별에 대해 한 번 더 재고해 볼 일이다.

아빠를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힘을 쓰는 일이었다. 힘을 쓰는 일은 엄마든, 아빠든, 삼촌이든, 이 모든 전연 상관없는 일이다. 어른의 힘이 필요한 거면 어른이라고 표현했으면 될 일이다. 아무 인식 없이 ‘아빠’의 존재를 텃밭을 꾸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참여자 분과 친구에게 그렇게라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 아빠 대신 부모님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부모님보다는 보호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쩌면 더 중립적이라고 그렇게 무수히 이야기 나누지 않았나. 어떤 말에 누군가가 소외받고 고통스럽다면 다수는 그 말을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모두에게 중립적이고도 안전한 말들이 차고 넘치는데 의식하기를 멈추고 기존에 알던 것들에 함몰되어 소수를 만들고, 가두고, 공격한다면 그건 반드시 고쳐야 할 언어 습관이다.

미처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오늘 하루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나의 말에 누군가가 불편하진 않았는지, 내가 쓰는 말들에 일방적이거나 이기적인 가치관이 숨어 있진 않는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내재되지 않는다. 언어는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하는 것에서 변화를 꾀하고, 변화하려는 나의 의지만이 낡고 불편한 관습에서 진보할 수 있다.

#도서지원 #책벗뜰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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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사우루스 그림책이 참 좋아 107
노인경 지음 / 책읽는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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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우루스 - 노인경

여기 어떤 말을 해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아니 사우루스가 있어요. 막상 나의 아이가 이러면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겠지만 그림으로 들여다보는 아니 사우루스의 대답들은 정말이지 기발하고 또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은 부정어를 먼저 습득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니야! 안돼! 안할거야!!! 그렇게 부정하는 저항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길을 만들어 간다는 의견에 십분 공감하지요.

아니 사우루스는 폭발한 엄마를 피해 사막 한가운데로 나갑니다. 우연히 마주한 커다란 이불, 그 이불을 쉬이 지나치지 못한 아니 사우루스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번뜩이는 생각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요? 그 이불 속으로 하나 둘 공룡들이 모여듭니다. 거대한 티라노 사우루스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지요. 두려운 대상이 다가올 때 보이는 흔한 반응들에도 아니 사우루스는 이야기 합니다. “우리한텐 뿔도 있고, 긴 목도 있고, 날개도 있고, 커다란 이불도 있잖아. 무엇보다도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잖아!”

어떠한 현상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거나 겁먹지 않는 아니 사우루스. 공룡들은 어느새 아니 사우루스 곁으로 모여 들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나누고 곧 티라노 사우루스를 맞닥뜨립니다. 숨기에 급급했던 커다란 이불을 이용해 티라노 사우루스를 물리친 아니 사우루스. 엄마에게 돌아가 공룡들에게 받은 바나나를 전해 줍니다. 엉뚱하고 말썽꾸러기 같았던 아니 사우루스는 그렇게 자신만의 경험을 펼치며 스스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듣는거야! 아휴 내가 못살아!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정말 내가 말하는대로만 움직이고 살아가는 아이가 정녕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자신만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그 올곧음과 단단함을 우리 어른들이 조금은 너른 시선으로 감싸주고 받아주기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다가 아니기에 어쩌면 이제 막 세상으로 발을 디딘 아이들이 전해주는 조금은 생경한 그 세계가 실로 더 나은 것들을 한뼘 더 당겨와 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bearbooks_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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