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 교수의 언어감수성 수업 -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말하기의 힘
신지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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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하고 돌아와 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아이, 잠시 후 바지만 입고서는 러닝(속옷으로 입는) 셔츠를 들고나온다. “엄마, 반팔이 없어서 이거라도 입어야겠어.” 저만치 서서 “그래, 집에서는 그거 입어도 돼. 더운데 잘 됐네. 훨씬 시원해 보인다.˝라며 미소 지었다. 몸을 돌려 빨래를 정리하다 말고 퍼뜩 생각이 나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아야. 엄마가 어제 책에서 봤는데, 반팔이라고 하지 않고 반소매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반소매?”
“응. 반바지도 반다리라고 하지 않고, 민소매도 민 팔이라고 하지 않는데 왜 반소매 옷은 반팔이라고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아이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반팔의 적확한 뜻은 팔이 반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팔이 반인 사람들에게 ‘반팔’이라는 말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불편한 말을 굳이 쓸 이유는 없다고, 얼마든지 순화해서 바꿀 수 있는 용어들은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찬찬히 설명했고 아이는 그러마라는 뉘앙스를 내비치고는 소파로 가 앉았다.

전작 <언어의 높이뛰기>를 인상적이게 읽었다. 독서모임도 진행하면서 우리가 쓰는 일상적인 용어들에 담아 내뱉었던 선량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교수님의 신작을 보자마자 서평단 신청했고, 운이 좋게도 따끈한 신작을 감사하게 읽었다. 몇 대 몇 식으로 전작이냐 신작이냐를 따진다면 나는 신작이다. 이번 신작이 특별히 좋았던 점은 바로 ‘관계’였다. 부제가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말 하기의 힘’이다. 관계로 바라보는 언어, 즉 말 하기의 문제점들과 시사점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예리하고도 친절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특별히 ‘말하기’를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인간관계.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하는 데에 이 ‘말하기’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겠는가. 단순해 보이는 ‘호칭’문제만 봐도 쉽사리 알 수 있다.

호칭은 정해진 직책이나 위치, 성별이나 지위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생각보다 중요한 말임에도 무수한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혹은 (그릇된)의도를 십분 담아 상대를 부른다. 대상을 부르지만 대상이 아닌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든 호칭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아가씨, 아줌마, 언니 등 어딜 가나 여성 직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불리는 이 호칭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혹은 친근하게까지 보이지만 호칭을 쓴 사람의 진심은 좀 더 부정적 의식이 깔려 있다. ‘간호사 언니’라고는 말하지만 남자 의사에게 ‘의사 아저씨’ 혹은 ‘의사 오빠’라고 하지 않는다. 재래시장 상인들에겐 아줌마라고 하면서 백화점 주방용품 매장 점원에게는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말 곰곰이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적절한 호칭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요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 즉, 매 순간 재고하고 곱씹고, 바꿔나가는 변화의 정성이 필요하다. 책은 호칭 문제뿐 아니라 대화에서 필요한 언어 감수성을 비롯 높임말과 반말이 내포하고 있는 연령 권력과 다중을 앞에 둔 말하기에 필요한 발언권 및 소통의 목적 등 한 번쯤은 인지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다뤘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기회가 닿아 가까운 곳에 텃밭을 분양받았다. 비용을 따로 낸 건 아니고 지인의 공동체가 운영하는 모임에 더부살이로 끼어 함께 하게 되었다. 아이뿐 아니라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텃밭으로 가게 되었다. 농사를 해본 적 없는 나는 땅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기존 참여자분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어느 정도 다져진, 그러니까 단순하게 가서 심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사 만만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다. 밭으로 가보니 돌과 나무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땅을 일일이 골라내고 다져 모종을 심을 수 있게 처음부터 모든 걸 다 해야 할 터, 순간 당황했지만 나름 깡다구 있는 성향이라 주저 없이 호미를 들고 작업에 착수했다. 잠시 뒤 기존 참여자분이 ‘아빠’를 찾는다. 보통 처음에는 아빠들이 와서 땅을 다지고,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아빠는 그럼….” 안 오냐는 말을 흐릿하게 줄이셨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아니나 다를까 땅을 골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고됐다. 아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물을 먹으라 이르지 않았는데도 저희들이 알아서 물통을 연신 기울였다. 뜨거운 태양빛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파며 크고 작은 돌들을 꺼내는 일은 힘들었다. 순간 함께 간 친구가 말한다. “와, 이거 진짜 애들 아빠가 있어야겠다” 엄마가 말을 하니 아이들도 주르르 “그래그래, 아빠가 와야겠어.”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 순간 뭔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지 않고 말했다. “아빠가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빠 없는 아이들은 이런 것도 못해? 아빠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물론 친구가 어떤 저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는 일. 그렇게 스며든 언어 차별에 대해 한 번 더 재고해 볼 일이다.

아빠를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힘을 쓰는 일이었다. 힘을 쓰는 일은 엄마든, 아빠든, 삼촌이든, 이 모든 전연 상관없는 일이다. 어른의 힘이 필요한 거면 어른이라고 표현했으면 될 일이다. 아무 인식 없이 ‘아빠’의 존재를 텃밭을 꾸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참여자 분과 친구에게 그렇게라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 아빠 대신 부모님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부모님보다는 보호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쩌면 더 중립적이라고 그렇게 무수히 이야기 나누지 않았나. 어떤 말에 누군가가 소외받고 고통스럽다면 다수는 그 말을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모두에게 중립적이고도 안전한 말들이 차고 넘치는데 의식하기를 멈추고 기존에 알던 것들에 함몰되어 소수를 만들고, 가두고, 공격한다면 그건 반드시 고쳐야 할 언어 습관이다.

미처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오늘 하루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나의 말에 누군가가 불편하진 않았는지, 내가 쓰는 말들에 일방적이거나 이기적인 가치관이 숨어 있진 않는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내재되지 않는다. 언어는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하는 것에서 변화를 꾀하고, 변화하려는 나의 의지만이 낡고 불편한 관습에서 진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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