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성공 전략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더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정도전이 누구를 왕으로 만들었느냐보다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했느냐였다.
정도전은 좋은 왕 한 사람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기보다, 왕이 부족하더라도 나라가 굴러갈 수 있는 제도와 원칙을 만들려고 했다. 특히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 모두 고려의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정몽주는 기존 질서 안에서 고치려고 했고 정도전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했다. 단순히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 자체를 바꾸려 했던 사람이라는 점이 새롭게 보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리더 한 사람의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조직이 얼마나 불안정할 수 있는지도 생각하게 됐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때만 잘 돌아가는 조직보다, 사람이 바뀌어도 일정한 방향을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이 결국 더 오래 간다. 정도전이 만들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나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권력 획득의 기술이라기보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따뜻한 말에 그치지 않고, 백성이 무너지면 결국 나라도 무너지기 때문에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비라기보다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도전의 모습이었다.
의외로 지금의 직장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도 많았다. 억울한 일을 계속 해명하는 데 매달리기보다 그 경험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 생각하라는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이름은 빠졌지만 자신이 만든 업무 방식은 조직에 남는 사례를 보면서 사람의 이름은 지워져도 그 사람이 만든 구조는 남을 수 있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성과라고 하면 흔히 승진이나 직책, 눈에 보이는 결과부터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좋은 성과란 내가 있을 때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누군가가 이어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나 기준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의 인정과 오래 남는 영향력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는 점이 장점이다. 정도전을 잘 몰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읽다 보면 조직과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된다.
다만 역사 속 복잡한 인물을 현대의 자기계발이나 직장생활에 연결하다 보니 조금은 이야기가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정도전을 역사적으로 깊이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부족할 수 있지만,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지금의 삶을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부담 없을 것 같다.
처음에는 왕이라는 단어에 눈이 갔는데, 오히려 만드는 자라는 말이 남았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내가 없어도 계속 작동할 무언가를 만드는 것. 사람보다 오래 남는 원칙과 구조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