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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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상의 소음이 소거된 진공 속, 오직 내 안에서만 환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냥 표현이 예뻐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문장이 계속 생각났다.


나도 가끔 오래전 일을 떠올리다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그날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때의 기분은 또렷하게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반대로 분명 내가 겪은 일인데도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는데, 그때 느꼈던 서운함이나 따뜻함 같은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요즘 나 역시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기억하는 게 정말 있었던 그대로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모습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드는 건 정확한 기억보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남은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기억의 무늬라는 말도 좋았다.


주인공 카미는 19년 전의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다가 손끝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과거를 하나씩 찾아간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가는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단순히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밝히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으면 그때의 나는 사라지는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도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잊어버린 시간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특히 천이나 옷, 가구, 냄새처럼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기억의 단서가 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기억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저장된 장면부터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냄새 하나나 오래된 물건 하나 때문에 갑자기 예전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 역시 길을 걷다가 익숙한 향을 맡거나 예전에 자주 듣던 노래가 나오면 한동안 잊고 있던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결국 남은 것은 기억한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이었다.


모든 일을 정확히 기억해야만 그 시간이 내 삶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순간은 얼굴도 이름도 흐려지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감정만은 오래 남는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시간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기억들이 겹치면서 하나의 무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에 남은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세상의 소음이 다 사라진 뒤에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 같은 것. 나는 그게 이 소설에서 말하는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마음까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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