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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과학 - 과학자가 풀어 주는 전통 문화의 멋과 지혜
이재열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요즘은 생활 속 과학을 다룬 책이 많다. 요리, 청소, 수납 같은 일상적인 행위를 과학 원리로 설명해주는 책들은 읽기 쉽고 재미도 있다. 그래서 '살림의 과학'도 처음에는 그런 책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살림을 과학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써왔던 살림살이와 생활 방식이 어떤 고민과 선택의 결과였는지를 묻는다. 반닫이, 옹기, 갓, 맷돌, 목화 같은 대상들이 단순히 옛날 물건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각각의 물건은 그 시대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답을 찾아낸 결과물로 소개된다.
읽다 보면 옛날 사람들은 참 지혜로웠다라는 말이 감탄이 아니라 거의 분석 결과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나무 상자의 구조나 옹기의 형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왜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가 차근차근 드러난다. 재료의 한계, 기후, 사용 목적, 반복된 시행착오 같은 것들이 쌓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굳어졌다는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은 전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요즘은 전통이나 옛 생활 방식을 이야기할 때, 괜히 감성적인 말부터 붙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살림의 과학'은 정겹다거나 아름답다는 말보다 왜 이런 선택이 합리적이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롭다. 전통이 박물관 속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술처럼 느껴진다.
또, 이 책은 한국의 살림을 특별한 것으로 떠받들지 않는다. 우리 것은 원래 대단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비슷한 조건에 놓였다면 어느 사회에서든 비슷한 선택이 나왔을 것이라는 태도로 서술한다. 이 점이 이 책을 더 믿을 수 있게 만든다. 살림을 민족적인 자부심의 소재가 아니라 인간이 환경에 적응해온 방식의 한 사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편리함을 기준으로 너무 빠르게 바꿔버린 것들,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사라지게 둔 것들이 떠오른다. 과거의 살림이 지금보다 무조건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의 깊이를 너무 쉽게 무시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실용서를 기대하고 읽으면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팁이나 요령이 많지는 않다. 대신, 생활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준다. 집 안의 물건을 볼 때, 예전보다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이건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이 방식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들어졌을까?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살림의 과학'은 살림을 잘하라고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살림을 다시 보게 만드는 책이다.
그 점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한 책을 찾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