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난중일기 코드 - 류성룡과 이순신의 위대한 만남
김정진 지음 / 넥스트씨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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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면 농사를 짓던 농부가 병사로 임대해 싸우는 ‘병농일치제’였어요.”


책 속 이 문장은 기억 속 오래된 장면을 전격적으로 호출했다. 어린 시절, 여름 장마가 걷히고 난 뒤, 할머니가 툭 던지던 말 언제든 누가 쳐들어올까, 늘 겁나 있었지 그 말이 당시엔 막연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책의 문장과 포개지는 순간 그것이 단순한 개인사적 회고가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였음을 깨닫게 한다. 국가적 무력감과 민중의 불안이 어떻게 일상의 작은 대화 속에 잔류하는지 그 오래 묵은 공기가 갑자기 형상을 갖추어 나타났다.


이 책은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나란히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두 기록의 결을 비스듬히 맞대어 생기는 틈을 보여준다. 그 틈에서 튀어나오는 장면들은 교과서적 서술과는 달리 뒤엉킨 감정과 왜곡된 시각, 그리고 역사의 어두운 지층 속에서 오래 눌려 있던 사실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은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소음처럼 흔들리며 독자의 인식 속에서 다시 조합될 자리를 찾는다.


500원 지폐의 거북선을 꺼내 보이며 “한국은 1500년대 이미 이런 배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자랑하는 장면은, 나의 또 다른 기억을 자극했다. 초등학교 교실 뒤편 햇빛 들어오던 오후, 친구들과 지폐를 빛 아래 비춰보며 이게 진짜 우리나라 배라고 흥분하던 장면. 당시엔 단순한 유치한 자부심이었지만 이 책은 그 감정 뒤편에 놓인 국가적 이미지 생산, 상징 조작, 역사적 기억의 정치학을 은근히 드러낸다. 어린 손끝의 감각이 이렇게 성인의 독서를 가로지르며 재배치되는 경험은 미묘하면서도 해방적이다.


강하게 와닿은 장면은 이순신의 거의 매일의 활쏘기 연습에 관한 대목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한때 새벽마다 반복하던 조깅의 감각. 두세 걸음마다 땅이 울릴 때마다 조금씩 안정되던 마음이 되살아났다. 장군의 훈련이 전쟁을 준비하는 일이라면 내 반복은 삶의 균형을 붙드는 작은 몸짓이었을 뿐이지만 반복이 몸의 리듬을 바꿔 삶을 지탱한다는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기록 속 꾸준함이 지금의 나에게 붙들릴 줄은 몰랐다. 역사적 반복과 개인적 반복이 기이하게 공명하면서 기록의 장면이 개인의 기억 구조 속으로 스며드는 방식이 분명해졌다.


책은 전쟁, 권력투쟁, 기록의 조작, 오해와 동맹, 그리고 인간의 편협함을 이미지처럼 던져준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시점과 감정이 덧칠된 다층적 장면이다. 몇몇장수의 오판, 대신의 음모, 백성의 절망, 서로 엇갈린 통찰… 이런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고 반사되며 독자의 내면에서도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는 두 개의 기록이 단지 사료가 아니라 나의 기억 속 잊힌 이미지들까지 되살려내는 매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록이 서로를 비춰주며 새로운 형태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역사란 기억과 기록이 부딪히며 생기는 새로운 사유의 틈을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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