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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어 마음사전 ㅣ 걷는사람 에세이 28
한창훈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9월
평점 :
『바다어음 마음사전』, 삶의 조류를 받아 적은 기록
1. 바다 앞에서 인간은 결국 같은 리듬으로 흔들린다
'바다어음 마음사전'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마을 풍경을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적는다. 뒤집힌 지붕, 물먹은 배, 부서져버린 집들도 감정적 과장 없이 늘 그랬으니까라는 어조로 지나간다. 자연의 무심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 책의 기본 박동이다.
그 장면을 읽자, 나는 예전 폭설에 갇혀 도로에서 밤새 멈춰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의 계획이 무력해지고 자연의 리듬만이 앞에 놓였던 시간. 책이 말하는 체념의 결이 그때의 나와 겹쳐졌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공유하는 감정적 리듬이 있다.
2. 말의 기원과 습관, 그리고 지역의 감정적 리듬
“애정만 나믄 비가 온다야.”
이 말의 어원을 캐보다 결국 도통 알 수 없다로 끝나는 장면이 흥미롭다. 말은 논리보다 먼저 생활의 감각에서 태어나고 공동체의 리듬 속에서 절로 굳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도 외갓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토박이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묘하게 그 어감이 마음속에 남아 나름의 정서를 만들던 기억이 있다. 말이란 그런 것이다. 저절로 합의되면 공용이 된다.라는 문장은 그 경험을 정확히 설명한다. 지역어를 통해 삶의 방식과 정서가 전해진다는 것. 이 책은 그 흐름을 사유적으로 포착한다.
3. 낯설게 하기와 익숙함의 균열
바다와 섬의 생활을 담백하게 기록하던 책이 파리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을 적는 순간, 목소리는 잠시 거칠어진다. 하지만 그 균열이 오히려 더 깊은 층위를 만든다. 이 책은 자연과 생활의 낭만만 쓰지 않는다.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겪는 모멸과 분노, 구조적 폭력까지도 삶의 파도로 함께 기록한다.
나 또한 외지에서 국적 때문에 불쾌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애매한 분노와 서늘한 소외감이 책 속 문장을 읽자 다시 떠올랐다. 익숙한 나를 깨뜨리는 순간, 세계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 책은 그 불편한 진실도 놓치지 않는다.
4. 결국 돌아오는 마음의 자리
파꽁지와 불락구이 한 접시로 충분하다는 문장, 그 단정한 음식의 사진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이것은 검소함의 미화가 아니라 마음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질서를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번잡한 음식보다 담백한 한 끼에서 더 큰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먹는다는 행위가 결국 오늘을 버티게 하는 최소 단위라는 사실을 책은 정확히 짚어낸다.
'바다어음 마음사전'은 높은 파도와 낮은 식탁, 자연의 격동과 일상의 숨결을 나란히 기록하며 말한다. 사람이 기댈 자리는 멀리 있지 않다. 늘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결국 이 책이 오래 남기는 건 거대한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에 마음을 비추는 인간의 흔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