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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이누준 지음, 이은혜 옮김 / 알토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고마워, 요타. 내 아이로 태어나 줘서, 그리고 이렇게 엄마를 만나러 와 줘서.”
이 한 문장에서 이미 눈물이 고였다. ‘무인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는 그저그런 감성 소설이 아니다. 처음엔 죽은 이를 다시 만나는 이야기라는 문장만으로 멜로드라마를 떠올리기 쉽지만 읽다 보면 그 슬픔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번진다. 작가 이누준은 초자연적인 설정을 빌려 사실은 아주 인간적인 문제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 무인역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아니라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더 가깝다. 현실의 시간은 멈춰 있지만 마음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공간. 그곳에서 인물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방법을 배우는 듯하다. 재회는 단지 기적이 아니라 이별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다.
하마나호 근처의 작은 역은 마치 시간의 틈새처럼 존재한다. 바람은 늘 같은 방향으로 불고 비는 잦아들 듯 다시 내린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그들의 감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이누준의 문장은 늘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고요한 수면 아래서 흔들린다. “계속 비가 왔잖아.” 이 짧은 한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인물의 마음속 풍경을 다 느낄 수 있다.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오래전에 겪은 순간이 떠올랐다. 입원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던 친구의 얼굴. 나는 그때 웃으려 했지만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 짧은 작별의 순간이 내 기억 속에서 늘 정지돼 있었는데 이누준의 문장을 따라가며 그 장면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녕이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나를, 작가가 대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조용함이다. 인물들은 울부짖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침묵이 독자의 마음속에서 울린다. 그리움과 후회, 사랑과 용서가 다층적으로 교차하며 독자는 어느 순간 그것이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누준은 슬픔을 감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것을 시간의 일부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해서 독자가 얻는 건 눈물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마음속의 잔잔한 평화다.
‘무인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는 기다림의 서사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단순히 재회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 안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기다림의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꿔 남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움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고요했다.
“태양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문장은 어쩌면 남겨진 우리 모두를 향한 작가의 인사일 것이다. “괜찮아, 네 마음을 내가 보고 있어.”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고, 동시에 그 슬픔 속에서 살아갈 용기를 건넨다.
이누준의 소설은 눈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별을 통해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사랑의 다른 얼굴을 이해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 무인역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 위에서 문득 깨닫는다. 기다림이 끝나도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