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말하는 아이 릴리 13 - 사바나의 여왕 동물과 말하는 아이 릴리 13
타냐 슈테브너 지음, 코마가타 그림, 김현희 옮김 / 가람어린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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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뉴스보다 동화가 더 현실적일 때가 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매번 싸우는 세상 속에서, 문득 인간 말고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동물과 말하는 아이 릴리 13: 사바나의 여왕'. 처음엔 귀여운 표지와 알록달록한 색감 때문에 아이들 책이겠지 생각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렸다.


이 책은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릴리가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사바나로 떠나는 이야기다. 그곳에는 위기에 빠진 야생동물들이 있고 릴리는 그들을 돕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단순히 착한 아이의 모험담이 아니다. 작가는 사냥과 생태 파괴, 인간의 이기심 같은 주제를 어린이의 시선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덕분에 읽는 동안, 현실의 뉴스보다 더 깊이 찔러오는 장면이 많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릴리가 동물들의 말을 통역하는 방식이었다. 동물들의 언어는 사실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단순하고 진심이다. 슬픔은 슬픔이고, 기쁨은 기쁨이다. 릴리는 그 단순함 속에서 인간의 복잡한 거짓말을 비춰본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진짜 소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듣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읽는 동안 마음이 여러 번 먹먹했다. 릴리가 만나는 사자, 기린, 코끼리, 그리고 상처 입은 동물들의 이야기가 은유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고통은 어쩌면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의 축소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릴리의 눈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단지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작가가 교훈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조용히 풍경과 대화를 통해, 인간의 자리와 책임을 묻는다. 릴리의 여정은 결국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타자와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이보다 오히려 어른이 더 곱씹게 된다.


책장을 덮고 나니, 이상하게도 내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 도시의 먼지 냄새 속에서도 사바나의 흙냄새가 섞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화분 속에 시들어가던 고무나무 잎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흘끗 쳐다본 걸까.


아마도 릴리가 그랬을 것이다. 당신도 들리죠? 세상의 모든 생명은 말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물을 조금 더 줬다. 혹시 모르잖나. 내 고무나무가 내일 아침 나를 사바나의 왕이라고 부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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