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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평점 :
노란 조명 아래 카페 창가에 앉아 이 책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긴 지 얼마 안 돼,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기억이요. 정신.’이라는 대사. 순간 창밖의 바다빛 하늘이 페이지 속 풍경과 묘하게 겹쳤고, 나는 잠시 독서도, 현실도 멈춘 채 그 장면에 가만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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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허의 첫 장편소설이자, 번역가로서의 명성과 작가로서의 실험이 동시에 담긴 작품.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기억과 언어, 욕망과 사랑이 교차한다.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파도처럼 스며들고 겹친다. 읽다 보면 이 경계의 흐림이 오히려 선명한 진실처럼 다가온다. 마치 빛의 스펙트럼을 하나씩 해체하고, 다시 합쳐 보는 실험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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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는 때때로 긴박하고, 때때로 고요하다. 총구 앞의 긴장과 리스본 골목의 햇살이 같은 호흡으로 흘러간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기억을 붙잡고, 잃고, 다시 변형시킨다. 독자인 나는 그들의 여정 속에서 내 오래된 기억 조각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그 조각들은 잊힌 감정의 잔향을 품고 있었고, 책의 문장들은 그것을 현실 위로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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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이렇게 미치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들은 어떻게 건너가는 걸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책 속 결말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일상의 어느 장면에도 이미 흩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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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각과 사유를 동시에 흔드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 한쪽에 영원이라는 단어를 남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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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은밀한 음악 같은 SF, 시처럼 번지는 문장, 그리고 끝없는 여운. 가만히 오래 머물고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