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에 대해서 저자는 무신론적인 자연주의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로 일단 큰 구분을 한다. 그 다음으로 대표적으로 가톨릭을 중심으로한 사제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분한다. 이때의 복음주의는 내가 알고 있는 복음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 책에서의 복음주의는 원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편적인 개신교 전체 그룹을 지칭하고 있다. 단 여기서 성공회는 사제주의로 분류되었다. 복음주의 내에서는 루터주의나 웨슬레주의 그리고 순수 보편주의적 입장을 보편구원론으로 분류하고 나머지 칼빈주의 계통을 제한 구원론으로 분류하였다. 저자의 논리 전개상 어쩔 수 없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편구원론이라는 그룹에 이런 저런 입장들을 모두 집어넣는 것은 매우 오해의 여지가 있다. 보편 속죄론과 보편 구원론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로서는 보편 속죄론은 보편 구원론과 다를 바 없으며 이미 도를 지나친 것으로 보이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제한 구원론도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그리고 아미랄드 주의로 구분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워필드가 정의한 칼빈주의에 대한 해설이 부록처럼 포함되어있다.저자가 학자로서 각 입장들을 분류하는 데에는 큰 의의가 있다. 체계적인 분류는 서로간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며 전체적인 관점을 제공해준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에서 매우 위험스럽게 왔다갔다하는 다양한 교파와 그룹들을 보면서 저자는 온전한 구원론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론은 지식적인 것으로만 전개할 내용은 아니다. 이는 신앙의 기초이며 매우 실제적이면서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학문적으로 그냥 분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데 워필드의 논리 전개에는 다소 위험스러운 부분이 많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정직하지 않은 느낌이다. 다른 입장들을 비판할 때에는 오버하지 않아야 한다. 한쪽 입장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왜곡되었다고 말하게 되면 처음부터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알미니우스나 웨슬리에 대해서 오해한다. 그리고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에 대해서 구분할 생각도 없다. 사실 웨슬리는 정확하게 본문에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을 마치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논리를 전개하며 몰고가는 것은 매우 옹졸한 평가이다. 제한 속죄론은 비판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입장이라고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저자의 본문 하나하나가 문제의 여지가 있는 문장이 수두룩한 것은 내가 제한구원론이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칼빈주의 교리를 의심스럽게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색안경을 끼고 상대의 입장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특히 학자로서의 정직성에 있어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의 학자적인 면에 비판을 가하고 싶었다. 그는 신앙에서의 인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글을 쓰고 있다. 마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칼빈주의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그러나 저자도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개신교에서 인정하는 전제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다. 문제는 인간이 움직이는 것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칼빈주의자로서 저자는 다른 입장을 매우 이단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입장인가? 나로서는 그들의 논리전개상 나오는 하나의 입장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책명 : 복음이란 무엇인가?저자 : 김세윤출판 : 두란노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청년회 교육을 마치고 두 달정도 후에 출판된 김세윤 박사의 책을 인터넷에서 봤으니까 약 4-5월쯤이었을까? 책의 목차만을 보고서도 마음이 흡족했다. 국내에 나와있는 복음을 설명하는 그 어떤 책들보다도 흡족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을 잘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책들은 후자에 대해서 제한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올해 초인 듯 싶다. 그의 책들을 읽게 되면서 코드가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유명한 신학자에게 그런 표현이 우스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책 하나 하나가 마음에 맞는다.이 책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학적 주제는 매우 주목받는 주제이지만 그만큼 왜곡된 개념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이를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이 있으며 예수님이 어떻게 선포하셨는지를 다룬다. 그의 글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몰이해를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복음을 논하는 흔하지 않은 그렇기에 슬프기도 하지만 귀한 책을 만난 것이다. 두번째 파트인 사도들이 강조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우리들이 늘상 들어온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점은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의 증언을 이어주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저자만의 생각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어떤 이들은 바울이 기독교를 창시했다고는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성경이 지지해주는 수많은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저자가 정리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국내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와있기에 읽는 이에게 앎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바울신학을 전공한 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쁜일이다. 그의 본 책은 읽는 이들을 변화시키며 큰 깨달음과 통찰력을 줄 것은 확실하다. 나중에 다시 정리할 마음으로 읽지않고 나누었다가 이제서야 읽게되었지만 목차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은 가치있는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본 후에 더욱 그 가치를 발견하게된다. 복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이 땅 위험한 신앙이 확산되는 시기에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 책이 가치가 있기에 짧은 서평으로라도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해 줄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나에게는 기쁨이 될 것 같다.'하나님의 나라(통치)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내몸 같이의 사랑)의 요구로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것,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치유인 것입니다. (p.72)
이 책은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의 구원론에 관해 다루며 서울 신대에서도 사용하는 책으로 알고 있다. 사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책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예전에 사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웨슬리주의 입장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웨슬리주의에 대해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교리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인 접근에 치중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다루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다. 웨슬리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오명과 비난을 받곤 한다. 알미니안주의의 폐해가 있기도 하지만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내용이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입장들이 극단적인 성향을 띈 점은 있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점이다. 이중예정과 신적 작정에 대한 칼빈주의의 해석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심각한 신학적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저자는 각 입장의 차이점들을 살펴보며 비교 분석해 준다. 그렇기에 이 책이 매우 재밌고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웨슬리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성은 그쪽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반부에는 웨슬리의 영향을 받는 신칼빈주의, 웨슬리안 칼빈주의, 칼빈주의적 웨슬리주의 등을 다룬다. 그리고 특별 예정 교리에 의해 야기된 신학적인 갈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준다. 저자가 결론으로 보여준 하나의 그림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그림이었는데 저자의 결론에 동일한 형태의 그림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괜히 읽은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는 것이 많다. 온통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읽은 나에게 웨슬리주의에 대한 좋은 이해를 더해 준 책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관에 있어서 웨슬리의 견해가 유사함을 또한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책과 함께 웨슬리에 대한 다양한 책을 보고 있는데 많은 점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웨슬리를 오해하고 펠라기우스주의로 매도하는 것에 다소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쪽을 극단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인데 계속해서 보는 책들 중 그런 책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이 책을 보면서 들었던 궁금한 점은 칼빈주의의 '제한적 속죄' 부분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는 점인데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마치 '보편 구원론'을 접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비슷하다. 벤자민 워필드의 책 하나를 보고 있지만 다른 견해를 정직하게 다룬 것 같지 않아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가득하다. 이 책도 그렇지만 한쪽을 강조하지 않은 책이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신학적 경향이 다르더라도 복음주의 안에서 두 입장이 공존 가능함을 살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로서는 사회적인 면에서는 신학적 정립이 잘 된 칼빈주의가 유익해 보이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웨슬리의 신학이 유익하게 다가온다. 부딛치는 신학적 부분은 오히려 바라보는 이들의 극단성에서 시작되는 면이 많아 보인다. 나의 어리석은 이해라고 바라보는 이도 있겠지만....'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하여 엄격하게 제한받는다. 하나님은 법칙을 만들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제한 안에서 진실로 자유롭다(p.94)'
진정한 사사는 하나님이시다(사사기 강해 / 마이클 윌코크)사사기에 대한 배경과 신학적인 분석 등은 다양한 구약 개론서나 구약신학 관련 서적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0여권의 책들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 그러나 막상 서점에 나가 국내에서 출판된 책들(번역서를 포함해서)을 구하려고 하면 마땅한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시리즈로 나온 주석서들에는 사사기에 대한 주석서가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에 나온 책들은 매우 낡은 책들만이 있었다. 특별히 강해책으로서 눈에 띄는 책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 BST 시리즈로 나온 책중에서 <사사기 강해>라는 책이 있어서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사서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구성도 좋고 내용도 매우 흡족하며 글도 매우 잘 써다고 평하고 싶다. 매우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어서 정말 많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사사기는 매우 다양한 사사들의 이야기이며 그 가운데 범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매우 우울한 책이다. 진정한 사사이신 하나님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여지며 홀로 외롭게 모든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있는 책이다. 사사기는 전체적인 구조면에서 대칭적인 면도 있고 구조를 통해 저자의 의도를 살펴 볼 수도 있는 문학적인 구조를 가진 성경으로 보인다. 저자는 사사기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매우 설득력있는 저자의 글솜씨에 반하게 될 것이다. 각 사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왜곡된 리더들의 모습을 보게되며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 가운데 진정한 사사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하시며 참으시며 모든 약속을 지키심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핵심적인 사사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1장부터 끝장까지 모든 본문을 다룬다. 몇몇의 사사들은 핵심적인 인물로 거론되지 않을지라도 사사기 전체를 일관된 구조로 설명하며 또한 일관되지 않은 매우 특수한 부분들을 잘 설명한다. 다른 역사서 개론서들이나 구약 개론서들에서 구조와 신학적 배경들 그리고 역사적 배경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면 강해서인 본 책은 강해서의 역할을 잘 담당하고 있다. 즉, 각 본문의 본질적인 메세지가 무엇이며 해당 인물들이 주는 메세지들을 잘 분석해 준다. 저자의 세밀하면서도 친절한 글 전개가 사사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가이다. 예상하지 못하고 지나친 본문의 내용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저자의 글솜씨는 정말 뛰어나다. 이 책의 부제는 '더욱 풍성한 은혜'이다. 사사기는 매우 암울하다. 마지막 부분은 더욱 그렇다. 기분이 심히 상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사사기는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성경에는 정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었다. 정말 암울한 시대에서 유독 은혜는 풍성했다. 인간의 약함 가운데에서 홀로 서 계신 전능자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이라면 사사기를 읽기를 권한다. 리더의 실체와 그 가운데서 진정한 리더인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사사기를 권한다. 그 가운데 본 책을 함께 본다면 사사기의 전체적인 메세지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것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성경을 보고 싶은 갈망을,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은 갈망을, 왜곡된 리더들을 향한 상처로부터의 치유함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이 꿈꾸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일뿐 하나님을 알고자 하며 전능자를 전능자답게 섬기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개인적인 평가가 현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그것을 말해 줄 이를 찾는 것조차 매우 힘들다는 현실 인식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이 책은 토저가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하는 매우 특별한 그러면서도 가장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책이다. 그의 책 제목에서처럼 토저는 오로지 하나님을 더 알게 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잘못 놓여있는 방향들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 내용을 전개한다. 토저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는 자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끄심이 인지 가능한 경험이 될려면 우리의 긍정적인 반응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솔직함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 안에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우리가 소유한 것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준비 속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이거나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면서 실재적인 경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올바른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주시라고 고백한다. 성숙한 신앙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의해야만 할 중요한 메세지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경건함을 위해, 좀더 풍성한 지식과 체험을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경건 행위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매우 분별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자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 괜찮은 존재로 드러내고자 하며 타인들에 그렇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매우 잘못된 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보잘것 없는 존재로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는 존귀한 자로 서있을 뿐이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와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하며 올바른 위치에 올려놓는 것... 그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의 행복이 확신 가운데 주어질 것이다.' 믿음은 그 자신에 대하여 최소 한도의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본질상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 믿음은 그 믿음이 높여진 대상에 관심이 집중될 뿐 믿음 자체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 - 복된 해방이다.'(p.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