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시장 골목엔 갖가지 가게와 좌판이 늘어서 각각의 매물과 각각의 인생들을 전시하고 있다. - P7
냄비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밖의 다른 것들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부창부수적인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말을 한다는것이 그토록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보증이 될 수 있을까. - P9
소꿉 살듯 닭을 희롱하던 아이는 이내 싫증이 났는지 도마 뒤에서 목을 잔뜩 빼어 내밀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가득찬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의 나도 그랬다. 저렇게 여윈 타조처럼 목을 잔뜩 빼고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내 몸에 속속들이 밴 생닭내 같은 치기는 전혀 모른 채. - P10
나는 분홍색 꽃핀을 만지작거리며 닿는 금속 모두를 녹슬게 하는 내 정신의 습기에대해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둘 수 있기라도 하듯 서랍을 딸깍 닫는다. - P14
아무리 하찮은 대상에라도 정신을 잃을 만큼 몰입하는 나를,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급진적인 경향이 있다. - P15
자랑스럽게도 내 몸속에는 기다림과 금욕적인 삶을 사주하는 위대한 피, 게으름을 운명으로 포용하는 철면피적 수도승의 혈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건 분명히 두부모 자르듯 부계 반 모계 반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 P17
기다림은 시간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한다. - P18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 P21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입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 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 P24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 - P24
아버지에게 결혼은, 암소 주인이 바라본 냄비처럼 몹시 그럴듯하게 보이긴 하지만 호기와 방탕, 그 무한한 자유의 암소와 바꿔치기하고 싶을 만큼 대단치는 않은 것이었다. - P26
부모님이 나를 합리화하는 방식 속에는 이미 나에 대한 수치심이 숨어 있었다. 부끄러움이 신화를 만들어냈고 신화에 족쇄가 채워진 그들은 차마 더는 아기를 낳을 수 없었다. - P30
신화는 그 유일무이성에 의해 권력을 보전하는 법이다.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유포시킨 파랑새 신화를 거울삼아 그것에 비추어 한 치도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수치심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수밖에 없도록 길러진 것은 당연했다. 나의 출생은 나의 양육 방식을 결정했다. - P31
목이란 부위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데도 적합하지만 무엇인가를 찾는 데도 적합할 것이라고 열아홉의 나는 믿었다. 나는 대학에서 그 밖의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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