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모든 일-승강기를 타고 아파트에 들어서고 냉장고에 넣어둔 묵은 음식을 먹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그런 일에 익숙해지고 아주 좋아하게 될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워낙 새로워서 입꼬리를 내린 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P10

내 피부색이 부드러운 천으로 한참 문지른 견과류의 갈색이라든가 내 이름이 뭔지 아는 것처럼 늘 알았고, 나로선 아주 당연했는데, ‘햇볕이 내리쬐면 공기가 따뜻하다‘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 워낙 빤하고 익숙해서, 당시의불행조차 지금 떠올리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였다. 텅 빈 잿빛 공간. 비가 내리고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풍경이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은 열대지방이 아니었고, 몸의 거죽도 속도 다 추웠다. 그런 감각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었다. - P11

다들 어찌나 친절하던지, 나더러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진짜 가족에게 그런 말을 하는 법은 없으니까. 가족이란 결국 내 삶의 목덜미에 맷돌처럼 매달린 사람들 아니던가? - P12

아이들이 없을 때면 내 책을 보고 저녁에는 학교에 갔다. 난 불행했다.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고향과 나 사이에는 대양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대양이 아니라 한 잔밖에 안 되는 물이라 한들 뭐가 달랐을까? 돌아갈 수는 없었다. - P14

그들에게 내 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내가 그들을 받아들였다는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내 꿈에는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걸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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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삶을 통제하고 있는 살인자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어떤 식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골짜기 같은 두려움에 절망을 느꼈다. - P437

인간관계란 상호 반응의 결과물이다. 내가 딱밤을 때리면 저쪽에서도 최소한 딱밤이 온다. - P459

"삶이 소중한 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야." - P491

견디고 맞서고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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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한도 제약도 없는 완벽한 자유란 없다. 자유란 적응하는 것,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든 환경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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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학자 특유의 위엄 있는 옷차림을 한 모습으로만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도 여느 평범한 이들처럼 친구들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법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기꺼이 즐기면서 집필했고, 그렇게 자신들의 저작을 완성했다. 그들의 삶에서 그 일은 가장 철학자답지 않으며 가장 진지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단순하고 평온하게 생활할 때 오히려 가장 철학자다웠다. 정치에 관한 그들의 저술 활동은 광인들의 병원과도 같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제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파스칼, 《팡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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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게 있다면 끝까지 지켜주는 게 친구가 할 일일 거야." - P363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다와 없다는 다른 문제였으므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 P378

"당신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방법을 깨닫는다면."
방법은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는 각 개인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롤라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 P379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 P388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 P390

인간은 기본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을 선호하고 거기에 안정감을 느낀다. 예상에 어긋나는 상황이 거듭되면 경계심이 생기고 불안해진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 P404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은 어떤 이에겐 저주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세월이 주는 축복,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도색 작업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상황과 감정까지 기록물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그 일을 다시 겪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노트 작업은 내게 바로 그런 일이었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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