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길이란 강을 따라 생겼고 또 강을 끼고 달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 P120

여러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여드릴 것이라고는 산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 무표정한 산들을 잘 보고 가십시오. 설악산 같은 절묘한 구성도 없고, 남도의 능선처럼 포근히 안기는 느린 곡선도 없습니다. 오직 직선과 사선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산의 정직성이고 강원도 태백산 자락의 진국입니다. 맛있게 요리된 반찬이 아니고 밭에서 금방 뽑아낸 싱싱한 무 같은 것입니다. - P122

아우라지에서 정선에 이르는 산과 강은 국토의 오장육부가 아니고서는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장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감상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고은 선생은 평창에서 비행기재를 넘어 비봉산 고갯마루에서 멀리 정선읍내를 바라볼 때 찾아온 감정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도달감과 단절감"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나는 그때 고은 선생은 강을 넘어가지 못하는 산의 숙명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P123

나는 여량땅 아우라지강가에 서서 낙엽송 군락들이 줄지어 정상을 향해 달리는 저마다 다른 표정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수수만년을 저렇게 마주보면서 단 한번도 만날 수 없음은 바로 그 자신들로 인하여 이루어진 강을 넘지 못함 때문이라는 무서운 역설(逆)의 논리를 배우게 되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각 분야의 어떠한 거봉(巨峰)들도 결국은 역사라는흐름, 민의(民意)라는 대세를 넘지 못하고 어느 자리엔가 멈출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한계,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을 보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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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정선으로 들어가자면 속칭 ‘비행기재‘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장 사람들 말로는 시외버스를 탈 때 생명보험 들어놓아야 한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험한 고개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버스 안에서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그 아찔함에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장사가 없다. 특히 운전석 쪽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치 허공에 떠서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에 비행기재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높기는 오지게도 높아 옛 고갯길 이름은 별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뜻으로 성마령 (星摩嶺)이라 했다. - P104

내남없이 강원도를 말할 때는 자기가 경험한, 정확히는 감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되었던 추억으로서 강원도를 말한다. 여타의 지방을 말할 때면 거기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이 이룬 향토문화를 먼저 말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것이다. 그것조차도 봄날의 강원도는 좀처럼 잡아내지 못한다. - P106

자신에게 부여된 별명을 거부하는 마음이란 곧 상처를 건드린 아픔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 P107

언제부터인지 나는 꽃과 나무를 보면서 한송이 한그루의 빼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낙엽송처럼 그 개체야 별스런 개성도 내세울 미감도 없지만 바로 그 평범성이 집합을 이루어 새롭게 드러내는 총합미를 좋아하고 있다.
개나리, 진달래, 들국화, 솔숲과 대밭.………… 지난 늦가을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비껴선 낙엽송 군락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한 의문이 있었다. 저 아름다움의 참가치에 이제야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나이를 들어가는 연륜 덕분인가, 아니면 80년대라는 간고한 세월을 살아왔던 경험 탓일까." - P108

"모르고 볼 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 없는 남의 땅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으로 가슴깊이 다가온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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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 개국, 2021년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21년 개정판)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일이든 하고야 마는 모습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정몽주를 그동안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건지 다르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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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동지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권력 아니던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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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에 몇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김삿갓 - P86

집이란 언제나 거기에 알맞은 사용자가 있는 법이니 의상 같은 스케일이 아니고서는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대신 큰스님들은 간간이 이곳을 거쳐가며 호방한 기상을 담아갔던 것은 아닐까. 절집도 사람집과 마찬가지로 살기 편한 집과 놀러 간 사람이 편한 집은 다른가 보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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