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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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 P92

말을 잃고 나자 그 모든 풍경이 조각조각의 선명한 파편이 되었다. 만화경 속에서 끝끝내 침묵하던, 무수한 차가운 꽃잎같이 일제히 무늬를 바꾸던 색종이들처럼. - P99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 P120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 P122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 P123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야 한다니. 이제 그만 안 웃고 살고 싶다. 그냥 내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어. 집에서라도 나는 안 웃으련다. 내가 안 웃어도 화난 거 아니니까 오해 마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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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학생들을 지켜보다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을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 P76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 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77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건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 P80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 P80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걸. 타고난 그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 P83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 P87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겸손하게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눈길인데, 때로 겸손하다는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을 때가 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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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 P52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P55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P62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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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무슨 수로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지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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