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학생들을 지켜보다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을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 P76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 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77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건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 P80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 P80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걸. 타고난 그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 P83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 P87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겸손하게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눈길인데, 때로 겸손하다는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을 때가 있다. - P91
|